[중국 고전 인물열전] (52) 석륵(石勒), 도광양회 능숙한 책략의 귀재

후조 세운 후 이민족 포용 등 치세 일궈
《진서(晉書)》 '석륵재기(石勒載記)'에 따르면 석륵은 서진(西晉) 말에 태어난 갈족이다. 집안이 몰락하면서 상인과 지주들의 전객(田客)으로 지내다가 반진의 기치를 내걸고 난을 일으켜 자칭 대선우,곧 황제라 칭하고 전조(前趙)의 실질적 창업자인 유연(劉淵)의 휘하에서 독립했다.

그는 한족 왕미(王彌)와 동시에 기병해 3,4년 사이에 입지를 다지는 데 성공했다. 1등 모사 장빈(張賓)의 책략에 힘입어 자신을 죽이고 군대까지 탈취하려던 왕미를 제거했다. 그러나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서진의 유주자사 왕준(王浚)이 걸림돌이었다. 1차 싸움은 석륵의 승리였다. 왕준은 석륵과의 전쟁에서 지고 나서 선비족과 오환족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이때 석륵의 군사 장빈이 왕준의 군사력이 쇠약해진 상황을 분석하고 오히려 석륵이 왕준에게 귀순할 의사를 표시해 경계심을 늦춰야 한다는 계책을 냈다. 결국 석륵은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왕준의 휘하에 들어가기로 한다. 그런 후 석륵은 그의 문객 왕자춘(王子春),동조(董肇),조고(棗高) 등에게 진귀한 보물을 가져가 왕준을 만나게 했다.

석륵은 서신을 보내 왕준을 천자로 추대하고 자신은 하나의 이름 없는 작은 호족에 머물러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병사를 일으켜 난폭하고 난을 일으키는 자들을 없애려는 것은 바로 당신을 위해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일 뿐입니다. 저 석륵은 당신을 부모처럼 추대하고 공경하는 바이며 당신 또한 저를 자식처럼 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그러고는 왕준에게 천하의 둘도 없는 보물을 바쳤다. 왕자춘에게도 금은보화를 주어 왕준의 마음을 흔들어놓도록 물밑 작업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왕준의 사마 유통(游統)이란 자가 왕준에게 불만을 품고 모반하더니 사자까지 보내 석륵에게 투항하기를 청한다. 석륵은 사자를 죽이고 그 시체를 다시 왕준에게 돌려보내 자신의 충성심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석륵은 몰래 정병과 무기를 단련시켰다. 모든 것을 준비한 석륵은 자신에 대한 왕준의 신임을 확인한 다음 일을 도모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첩자로 박아둔 왕자춘을 불러들여 유주의 상황을 들어보니 왕준이 민심을 완전히 잃었고,아랫사람들도 언제든 모반할 태세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314년 석륵은 유주를 습격했다. 석륵의 군대가 역수(易水)에 도달했을 때 도독이 즉시 왕준에게 석륵의 군대가 도달했다는 소식을 전하면서 대항할 것을 준비하자 석륵을 철석같이 믿는 왕준은 오히려 "석공(석륵)이 이곳에 온 것은 분명 나를 천자로 추대하기 위한 것이니 누구도 그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명했다. 왕준은 석륵의 군대가 성안으로 진입하고 나서야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때는 늦었다. 석륵은 부하를 보내 왕준을 사로잡고 그를 주살한다. 그리고 5년 뒤 후조를 세웠다.

이렇다할 기반도 없이 창업에 성공한 석륵.글도 몰랐으나 귀순해 온 한족을 잘 다스리고,학교를 세우고,한족과 이민족의 공존을 모색한 그는 탁월한 인재등용과 인문정신의 소유자였다. 겸허한 처신과 빼어난 치세로 한고조 유방과 광무제 유수 사이에 놓인 제왕으로 평가받는 석륵은 정권을 탄생시키는 과정에서는 철저히 도광양회(韜光養晦 · 빛을 감추고 어둠 속에서 자신을 기르는 강단)와 허허실실(虛虛實實)을 적절히 활용한 책략의 귀재였다.

김원중 < 건양대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