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성 여행] 1080 돌계단 한발 한발…108번뇌가 눈녹듯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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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남 예산(上)
천하明堂 남연군묘…2대 걸쳐 고종·순종 나왔지만 정작 무덤은 파헤쳐졌으니…
청년 윤봉길 살던 저한당…"나라 빼앗긴 건 무지 때문" 아직도 청천벽력의 울림
수덕사 일주문 지나자 "자네 뭐하러 왔나" 만공스님의 벼락 같은 죽비 소리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향해 언덕을 오른다. 망주석과 석양(石羊)이 지키는 무덤 앞에 서자 가야산(678m) 봉우리들이 한눈에 올려다보인다. 흥선대원군이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터라는 풍수가의 말에 혹해 가야사를 불태우고 부친의 묘를 이장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좋은 곳이다. 그러나 산 자에게 명당이 망자에게도 명당이란 법은 없다. 독일인 오페르트의 도굴 사건으로 망자는 편안히 잠들지 못했을 터이니 말이다.
◆가야사를 불지르고 묘를 쓴 대원군길가 상여각에 있는 남연군의 시신을 운반했던 남은들상여를 들여다보고 나서 상가리 마을 으름재 계곡에 있는 미륵불로 향한다. 작은 부처가 조각된 관을 쓰고 있어 관세음보살이 분명한 이 '미륵불'은 대원군이 묘와 마을의 화를 막아내고자 세운 것이라 한다. 대원군이 아들인 고종이 왕위에 오른 후 보은하려고 지었다는 서원산 기슭 보덕사로 가는 길은 고즈넉해서 사색하기에 좋다.
가야사 터에서 가져온 고려시대의 석등이 달려나와 나그네를 맞는다. 사천왕상이 조각된 화사석만 남은 석등을 대석과 옥개석 등을 새로 만들어 세워 놓았는데 그럴싸하다.
옥계저수지 가에 있는 헌종대왕 태실을 둘러본 후 예덕 상무사의 본거지였던 덕산 장터에 이른다. 현대식 철 구조물로 지은 덕산시장이 '조동모서(朝東暮西)'의 보부상의 시대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뜻을 이루기 전엔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
덕산온천지구를 지나 윤봉길의사사적지에 닿는다. 윤봉길(1908~1932) 의사를 모신 사당인 충의사로 오른다. 의사의 영정이 너무 정적이고 유약해 보인다. 보부상유물전시관에서 예산 · 덕산에서 활동하던 보부상 조직인 예덕 상무사가 남긴 유품을 들여다본다. 접장의 명단을 적은 《선생안(先生案)》,정부로부터 온 협조 명령을 모은 《예산임방절목부한성부완문》 등 각종 전적과 공문 등이 대부분이다.
윤봉길의사기념관으로 발길을 옮겨 거사 당일 아침 김구 선생과 바꾸어 찬 회중시계 등 신변 용품과 농민계몽서인 《농민독본》 등을 들여다본다.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장부출가생불환'이라 쓴 붓글씨 족자와 사형을 집행할 당시에 묶였던 형틀대가 '나는 의사다'라는 걸 말없이 웅변한다. 윤봉길의사상을 바라보며 그가 1911년(4세)부터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살았던 저한당에 이른다. 저한당이란 한국을 건져낸 집이라는 뜻이다. 생가인 광현당과 농민운동의 근거지였던 부흥원이 있는 도증도(島中島)로 향한다. 묘표 사건을 계기로 무지야말로 나라를 빼앗기게 된 원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의사는 야학을 설립하고 부흥원을 세워 일본 상품을 배격하고 부업을 장려하기도 하면서 공동구매조합을 만드는 등 농촌계몽운동에 뛰어든다.
그러나 1930년 이 모든 활동을 접고 만주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한 의사는 1932년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겸 전승축하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상해 파견군사령관 시라카와 등을 죽이고 25세의 나이로 순국한다. 아마도 그의 의거는 오랜 식민지 생활로 자포자기와 무력감에 빠졌을 식민지 청년들의 정신을 일깨우는 청천벽력 같은 기폭제가 되었을 것이다.
◆만공은 수덕각시의 환생덕숭산 수덕사 일주문을 들어서자 이응로(1904~1989) 화백이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까지 작품활동을 했던 수덕여관이 고개를 내민다. 여관 앞 두 개의 바위엔 동백림 사건 후 이곳에서 요양하면서 새긴 암각화가 있다. 마음에 품은 생각을 직설하지 못하는 시대에선 문자마저 추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황화정루 지하의 성보박물관에서 개심사금동여래좌상,일락사철불,백의관음인 소조불상좌상 등을 돌아본다. 경허,만공이 쓴 붓글씨와 만공이 의친왕 이강에게 받았다는 거문고가 이채롭다. 대웅전 마당은 온통 꽃등의 물결이다. 기둥 5개를 세워 4칸으로 분할한 대웅전 측면의 기하학적인 조형미를 바라본다. 간결한 것이 왜 아름다운가를 설하는 대웅전의 법문이다.
중건을 위해 공양주를 자처한 수덕각시와 그를 사랑했던 신라의 재산가이자 재상의 아들인 정혜의 설화가 서린 관음바위를 찾는다. 절의 중건이 끝나면 정혜의 청혼을 받아들이겠다는 수덕각시의 말을 믿고 정혜는 중건 불사에 전 가산을 보탰다. 그러나 불사가 끝나자 수덕각시는 바위를 가르며 홀연히 사라지고 만다. 정혜는 하릴없이 수덕사 뒷산으로 올라가 정혜사를 짓고 수도에 전념했다고 한다.
설화 속의 수덕각시는 영영 사라진 게 아니다. 1920년대 수덕사를 다시 크게 일으킨 만공 스님이야말로 수덕각시의 환생이 아닐지.만공 스님이 세운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선원인 견성암으로 향한다. 개화기의 신여성 김일엽(1896년~1971)이 모험적인 연애를 편력하다 입산해 '청춘을 불살랐던' 암자다. '40년 수덕사 귀신' 벽초(1848~1912) 스님이 지은 인도식 2층 석조 건물이 고요를 광배처럼 드리운 채 좌정해 있다.
벽초 스님이 놓은 1080개의 돌계단을 밟으며 정혜사 능인선원을 향해 덕숭산을 오른다. 1920년 중반에 지은 암자 소림초당이 초가지붕을 한 채 절벽 끝에 좌정하고 있다. 초당으로 건너가는 갱진교는 만공 스님이 달빛을 벗 삼아 거문고를 탔다는 다리다.
만공 스님이 세운 커다란 관음보살입상과 향운각을 일별한 후 만공탑에 이른다. 탑의 상부는 만공의 법명인 월면을 형상화한 구형원상이다. 측면에 새겨진 "허공이 가장 무서운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는 법구가 폐부를 찌른다.
석문을 지나 정혜사로 들어선다. 능인선원 앞마당에 서자 파란 육모기와지붕을 한 금선대가 내려다보인다. 만공이 조실로 쓰던 곳이지만 현재는 경허 · 만공 · 혜월의 영정을 모신 진영각으로 쓰고 있다. 만공(1871~1946)은 한국 근대선맥의 중흥조 경허 스님의 법을 이은 분이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조선 총독 미나미가 "조선 불교도 일본 불교에 합쳐야 한다"고 말하자 "조선 불교를 진흥하는 길은 조선 불교를 간섭하지 않고 조선 승려에게 맡기는 것"이라고 일갈한 기개 있는 스님이다.
금선대 돌계단 옆에 있는 '나가대정(那迦大定)'이라 암각한 바위를 바라본다. '나가대정'이란 부처님의 큰 선정력(禪定力)을 말한다. 나가대정 바위 앞,만공이 좌선했다는 만공대에는 이제는 커다란 허공이 된 만공이 앉아 있다.
'만공월면께서/ 금선대 걸터앉아/ 단소를 오두마니 부르시었다// (…) // 단소소리 한곡이 갔다/ 바람이 이어났다/ 무슨 일로 왔는가/ 그의 앞에/ 고개 숙인 한 사람/ 음전하디음전한 대답이었다// 지난 해 저더러 꼭 오라 하셨습니다// 누가 그랬던가/ 내가 그랬던가/ 그대 혹여 단소불 줄 아는가// 모릅니다// 내년에는 불 줄 알리라 가거라 가서 다시 오너라.'(고은 시 '금선대' 부분)
스님,저는 아마도 가서 다시 오지 못할 듯 싶습니다. 내년에도,내후년에도 영영 영혼의 단소를 불 줄 모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 푸짐한 산채정식으로 허기진 배 채우고 덕산 건축박물관 가서 삼국~조선 건축美에 '푹'
◆ 맛집
'싸리꽃을 애무하는 산 벌의 날갯짓 소리 일곱 근/ 몰래 숨어 퍼뜨리는 칡 꽃 향기 육십 평/ 꽃잎 열기 이틀 전 백 도라지 줄기의 슬픈 미동 두 치반/ 외딴 집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소낙비의 오랏 줄 칠만 구천 발/ 한 차례 숨 죽였다가 다시 우는 매미 울음 서른 되.'(안도현 시 '공양' 전문)
산사에 가면 모름지기 이런 공양을 들고 와야 영혼이 배부른 법이다. 그러나 영혼의 포만감과는 별도로 육신의 허기는 채워야 한다. 덕산면 사천리 6-4 수덕사 앞 그때그집(041-337-6633)은 유명한 산채정식집이다. 생선구이,도토리묵과 전,밑반찬 등 나오는 찬은 그리 많지 않지만 담백하면서도 정갈한 것이 특징이다. 특히 쌉쌀하면서도 향긋한 더덕구이가 입맛을 돋운다. 산채한정식 1만2000원,비빔밥 8000원.
◆ 여행정보덕산면 대동리 152-15 한국고건축박물관은 우리민족 고유의 건축미를 응집 표현해 고건축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세계인들에게 그 우수성을 홍보하기 위해 건립한 국내 최초의 건축박물관이다. 부지면적 1만8150㎡(연건평 3630㎡)에 지은 박물관의 제1,2전시관 정문은 강릉의 객사문을 그대로 옮겨놓았으며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따라 지었다. 제1전시관은 삼국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사찰,탑,불상 등 17종의 축소 모형 100여점을 전시하고 있다. 제2,3전시관에는 국보급 문화재의 축소 모형을 전시하고 있다. 문화재 수리 기능 17개 직종인들의 혼과 노력이 담긴 우리 건축기술의 모든 것을 살펴볼 수 있는 박물관이다. 관람료는 1000~3000원.홈페이지(ktam.or.kr).(041)337-5877
안병기 여행작가 smreoquf@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