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전광영 작가 "수천 조각 韓紙로 빚은 조형세계…한약 봉지서 영감 얻었죠"

● 6년 만에 국내서 개인전 전광영 작가

큰할아버지 한약방서 놀다
수많은 사연 깃든 古書 종이, 약보자기 보며 상상 나래

나이 쉰부터 활짝
30년 무명, 대관전 작가 전전…'집합' 연작으로 글로벌 스타

"쟁기 든 사람은 뒤 안 본다"
70대 눈앞, 인생 반환점 안 지나…우리것으로 세계 감동시킬 것

달 표면의 거대한 분화구를 닮았다. 타원형의 웅덩이 옆에는 겹겹이 뻗은 산맥,그 윗부분에는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와 숲이 펼쳐진 듯하다. 무수히 많은 삼각형 한지 조각들을 박아 만든 그의 작품을 멀리서 보면 이처럼 입체조형이다. 그러나 다가가서 보면 평면에 가깝다. 회화와 추상,미니멀리즘의 경계를 넘어서는 그의 작업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 전광영 씨(67).그가 내달 1일부터 30일까지 한 달 동안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현대강남(02-519-0800)에서 대규모 전시회를 갖는다. 국내에서 여는 개인전으로는 6년 만이다. 전시 제목 'Aggregation(집합) 2007-2011'처럼 2007년부터 올해까지 작업한 대작들을 한꺼번에 보여준다.

그는 1995년부터 스티로폼을 크고 작은 삼각형으로 잘라 한자가 적힌 종이로 보자기처럼 싼 뒤 이를 다양한 형태의 '집합' 구조물로 꾸민 연작으로 세계 미술계를 놀라게 했다. "수천 수만개의 스티로폼 조각을 한지로 싸서 종이 끈으로 하나씩 맵니다. 한지는 주로 고서를 사용하는데 역사성이 있는 종이죠.한지에는 그걸 만든 사람과 책을 만든 사람,돌돌 말고 포장한 사람들의 지문이 찍혀 있어요. 종이 끈도 사람들이 일일이 말아서 꼰 겁니다. 왕십리의 윤씨 가문 종친회 할아버지들이 10년째 꼬아오고 있는데,맨 처음 꼬았던 할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혼이 깃든 작은 조각들을 핀셋으로 하나씩 꽂았다 뺐다 하면서 맞춰갑니다. "

이같이 한지를 3차원적인 모형으로 접고 종이 끈으로 묶어 입체조형을 만들면서 회화와 부조의 접목을 꾀한 그는 2008년 뉴욕 로버트밀러갤러리 개인전을 시작으로 코네티컷주의 얼드리치현대미술관,와이오밍대학미술관,일본 모리아트센터 등에서 초대전을 열며 세계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

내달 미국 테네시주의 녹스빌미술관 개인전을 비롯해 내년까지 중국 베이징의 금일미술관,스페인 마드리드의 페르난도라토레갤러리 등 주요 미술관 전시회가 예정돼 있다. 독일 슈투트가르트의 쿤스트베르크잠룽미술관에서는 현대미술의 최고봉으로 꼽히는 안젤름 키퍼,독일 미술의 거장 고트하르트 그라우프너와 3인전도 갖는다. 호주 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 그의 작품이 수록된 데 이어 곧 미국 대학교재에도 채택될 예정이다. 그가 한지로 작업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어릴 적에 눈만 뜨면 큰할아버지댁으로 뛰어갔습니다. 한약방을 운영하던 큰할아버지는 환자들의 이야기를 정성스레 듣고 맥을 짚은 다음 진단서를 초서로 멋있게 쓰고는 삼각형 모양으로 약을 접어 보자기에 싸서 들려 보냈어요. 그 광경이 너무나 멋있어 날마다 가서 구경했죠.그러면 큰할아버지는 늘상 찾아와서 성가시게 하는 손주를 쫓아보내려고 1환을 쥐어줬고 저는 그걸로 사탕을 사먹었지요. 그때 모습이 저에게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약을 싸던 한지의 결,보자기의 정성,약탕기에 정성 들여 약을 달이던 아낙네의 모습 등이 제 작품에 녹아들기 시작한 겁니다. "

그의 말대로 '천년을 견딜 수 있는 최고의 종이'인 한지로 이렇게 움푹 파인 웅덩이나 갈라진 대지,상처 자국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웅덩이에 색을 입혀 높낮이를 표현한 게 아니라 염색한 조각을 일일이 평면에 박아 마치 함몰된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걸 알 수 있잖아요. 그 분화구는 너무나 각박해진 우리의 삶,상처받은 내면의 이야기를 표현한 것입니다. 작품 속의 대지는 황폐화된 우리 영혼의 바닥이지요. 역사상 가장 잘 사는 시대여서 여유도 있고 배려도 있어야 하는데 모두들 급박하고 삭막해요. 정신적인 가치를 잃어버리고 사니까 심각한 일이죠.메마른 인간의 마음을 그린 것인데 얼마 전부터는 희망을 그리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마음 저 뒤편에 희망이 있다라는 뜻으로 푸른색과 붉은색을 쓰면서 변화를 주고 있습니다. "

그는 우주에서 지구를 봤던 우주인 이소연 씨의 말처럼 각박한 세상에서 동경의 대상으로 이곳을 볼 수 있도록 표현했다고 말했다. 언밸런스한 구도를 포함해 조형적으로 회화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들도 많이 시도했다고 했다.

"에너지의 분열이나 고뇌의 파장을 모티브로 한 작품도 있습니다. 작품은 끊임없이 변해야 해요. 한곳에 머물러 있으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지요.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독특하거나 자기 것을 갖고 있지 않으면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저는 한국인이죠.그러나 한국적인 것만 고집하는 게 아니라 우리의 것을 그들이 이해하고 흡수할 수 있도록 해야 진짜 세계적인 것이 됩니다. "그의 표현대로 세계에서 이런 작업을 하는 작가는 그밖에 없다. 가장 유명한 아트바젤에서도 서구 화랑 관계자들과 관람객들이 그를 다 알아본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의 부관장 말라 프라도는 "당신이 미국 시민권자였다면 이미 예전에 휘트니미술관에 들어왔을 것"이라며 칭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그가 성공한 것은 아니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고무공을 처음 구경했을 정도로 깡촌에서 자랐다.

"강원도 홍천에서 고목에 칠판을 걸어놓고 산과 들에서 공부하고 진달래,메뚜기를 먹고 돌아다녔어요. 미군들에게 '헬로 기브 미 초콜릿' 외치며 뛰어다니던 꼬마였죠.초등학교 6학년 때 서울로 왔습니다. 제가 2대 독자인데,자수성가한 아버지가 화신상점(화신백화점 전신)에서 포목점 점원으로 돈을 벌어 공부시켰어요. 그래서 법대에 가길 권했죠.고3 때 새벽 4시까지 설득하는 아버지에게 '못 갑니다,미대 가겠습니다' 했습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내쫓겨서 고학으로 홍익대 미대를 다녔죠.신문에서 그림 가정교사를 구한다는 광고를 보고 찾아갔더니 박정희 정권의 청와대 경호실 차장 집이었어요. 첫째딸과 둘째딸에게 그림을 가르쳤는데 4학년 때는 그 '차장님'에게도 미술을 가르쳤죠.높은 분이 미술 얘기를 자주 하는데 맞장구라도 칠 수 있도록 가르쳐달라는 것이었어요. "

어렵게 졸업한 후 그는 미국 필라델피아예술대 대학원으로 유학 갔다. 거기서 놀란 것은 학생들의 자유로운 응용력과 창의력이었다.

"미대 1학년 강의실에 가봤더니 우리나라에서 고등학교 때 다 배운 걸 하고 있더군요. 4학년 역시 기교 측면에서는 우리보다 훨씬 수준이 낮았어요. 그런데 30명이 앉아서 각기 다른 작품을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 미대 4학년 교실에서는 57명이 다 똑같은 그림을 그렸는데 말이죠.매우 중요한 차이입니다. 예를 들어 20명이 수업하면 교수는 멀찍이 떨어져 있고 학생 1명이 19명에게 자기 작품을 설명해요. 19명은 가차 없는 질문과 난상토론으로 그를 몰아붙이고,그는 논리정연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철학을 만들어가는 거죠.우리나라는 그에 비해 수동적이죠.정말 많은 엘리트 미술 전공자가 배출되지만 뛰어난 작가가 드물어요. 내 것이 아닌 것을 하는 것은 얼마 못가 사라집니다. "

그는 "제 작품 세계가 50년 동안의 인고 과정에서 형성됐기 때문에 관객의 작은 반응 하나도 엄청난 비타민이 된다"고 말했다. 물론 유학 시절의 고통도 그에겐 거름이 됐다. "이주 노동자들보다 더 힘들게 지냈어요. 대학원을 졸업한 1971년부터 6년 동안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더 어렵게 살았죠.영양실조로 아이들이 황달을 앓았는데 그때 사진 보면 지금도 가슴이 짠합니다. 아내는 그렇게 힘든 시절 한번도 저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격려해줬어요. 귀국해서도 저는 그림만 그렸고 남들이 성공해서 좋은 화랑에서 전시할 때 대관전시나 하던 시절에도 늘 그렇게 묵묵히 응원해줬죠."

그는 스스로 마라톤 선수라고 했다.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개발하고 자신의 것을 만들어가는 마라토너.아직 인생의 반환점을 돌지 않은 선수다. "위대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여건을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죠.어차피 먼 길을 걸어왔고 60대를 넘어 70대를 앞두고 있지만 물리적인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하지요. 쟁기를 든 사람은 절대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할 일 많은 사람은 한눈을 팔 겨를이 없어요. "


◆ 고민 많은 현대인 형상화…3m50㎝ 설치작품까지
초대형 '집합' 시리즈…6월 갤러리현대강남 전시

전광영 씨가 내달 갤러리현대강남에 선보일 작품 중 'Aggregation(집합)09-SE056'(사진)의 높이는 3m50㎝에 이른다. 액자 속에 들어 있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사방을 돌아가며 감상해야 하는 초대형 설치작품이다. 고민 많은 현대인의 두상을 크고 작은 삼각형의 한지 묶음 수천개로 조형화한 것.

윗부분에 삐죽삐죽 돌출돼 있는 큰 조각들이 아래로 내려올수록 작고 촘촘해진다. 마치 두상의 머리카락과 피부의 솜털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듯하다. 바닥에도 수많은 조각들이 쌓여 있다. 가까이 다가가 관찰하려다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그야말로 3차원 입체 공간과 2차원 평면 바닥을 모두 활용한 작품이다. 특정 방식으로는 다 형용할 수 없는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불확실성을 묘사한 것일까.

그는 바닥에 떨어진 종이실 한 가닥을 집어들더니 "한지를 손바닥으로 말아 끈을 만들고 이것으로 스티로폼 조각을 싼 한지를 하나씩 묶는데 그 과정에 인생의 온갖 사연과 희로애락이 응축돼 있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면 그 많은 손길에 녹아 있는 시간과 이야기와 지문들을 아우르며 하나의 작품을 창조하고 그것을 감상하는 우리까지 예술의 씨날줄로 함께 엮어주는 것이 그의 작업이기도 하다.

가로 4m짜리 신작도 눈길을 끈다. 파편화된 인간 관계와 분열적인 사회 현상을 부드러운 질감의 한지 작업으로 어루만지는 그의 정신이 거대한 빛처럼 작품에 반사된다. 한약방을 운영하는 큰할아버지가 삼각형 모양으로 약을 포장하는 모습을 어릴 때부터 봐왔던 그가 한지를 입체적으로 접어 인간 삶의 의미를 담아내는 매개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미감을 두루 갖춘 글로벌 예술이 유년기의 향수에서 비롯됐다니….

해리 필브릭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미대 박물관장이 "전광영은 두 가지 언어,즉 미술의 모더니즘이라는 언어와 장소성이라는 시적 언어에서 모두 확신과 능숙함을 보여준다. 그가 창조해내는 작품은 이 두 가지 힘을 결합시키는 능력으로부터 나온다"고 극찬한 이유를 알 것 같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유엔본부와 록펠러재단을 비롯해 윌리엄펜기념미술관(필라델피아),호주국립현대미술관(캔버라),국립현대미술관(과천),리움(서울),호암미술관(용인),피델리티투자회사(보스턴),콘티넨털-벤탈 L.L.C(워싱턴),로즈웃스톤그룹(캘리포니아),오라클그룹(뉴욕),체이스맨해튼은행(뉴욕),LG그룹,한화그룹,웅진그룹,한진해운,신라호텔,조선호텔,일신방직,세아그룹 등에 소장돼 있다.

만난사람=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