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200년 전 중국에도 '양쯔강 조망권' 있었다

승사록,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 표류기|최두찬 지음|박동욱 옮김|조남권 감수|휴머니스트|544쪽|2만원

조선 지식인이 본 中 강남 모습
중국의 '거창한 식습관'도 소개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캐스트어웨이',해리슨 포드 · 앤 헤이시가 호흡을 맞췄던 '식스데이 세븐나잇'.둘 다 표류를 소재로 한 영화다. 주인공들이 흥행 보증수표이기도 하지만 대체로 표류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지 않는다. 표류는 예기치 않은 사건이기에 수없이 반복되는 삶과 죽음의 순간이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어떤 소재보다 긴박감과 사실감을 주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 선비의 중국 강남 표류기'라는 부제를 단 《승사록》은 조선시대판 '식스데이 세븐나잇'이라 할 수 있다. 여인이 등장하지 않고 무인도가 아닌 중국의 강남(江南)이 무대라는 차이가 있다. 당시에 강남이라 불린 이곳은 항저우가 성도인 저장성 지역이다. 양쯔강 삼각주 아래쪽에 위치해 강남이라 불렸다. 조선 후기의 선비 최두찬은 1817년 제주 대정현감이던 장인의 부름을 받고 제주도로 간다. 1년간 제주 여행을 하며 일기를 남기고,이듬해 귀향길에 오르지만 도중에 큰 풍랑을 만나 16일간 표류 끝에 저장성 동부의 닝보(寧波) 해안가에 닿았다. 책은 저자가 제주에서 남긴 기록에 더해 일행 50명과 함께 했던 표류의 시간,육지에 닿은 뒤 보고 들은 청나라의 풍습,중국 지식인들과 나누었던 필담,당시의 가옥 · 의복 · 농사 · 무덤 등을 눈에 보이는 듯 생생하게 보여준다.

"5월19일.날이 개었다. 상우현에 도착해 아침밥을 먹고 이십 리를 걸었다. 조아강(지금의 양쯔강)에 이르렀다. 강의 양 기슭은 모두 부유한 상인들의 집이다"라는 기록에서는 당시에도 '양쯔강 조망권' 같은 개념이 있었으리라 짐작이 간다.

"술을 한 잔 돌리고 나면 안주가 곧바로 나오고 한 번 수저를 놓으면 그 안주를 물린다. 다 마시고 나니 안주가 서른 그릇이나 되었다. 대개 이쪽 사람들은 큰 접시에 물고기와 육고기를 한 그릇에 담아 함께 먹는다"는 음주 풍속에 관한 구절에선 예나 지금이나 거창하게 마시는 중국인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중국 사람들이 물었다. 귀국의 왕은 성(姓)이 무엇이며,이름은 어떻게 됩니까. 어느 해에 개국하였으며,정벌하여 얻은 것입니까? 선수(禪受)하여 얻은 것입니까? 내가 답하였다. 국성(國姓)은 이(李)이고,휘(諱)는 신하된 사람이 감히 말할 수 없는 바입니다. 또한 동방의 요순(堯舜)입니다"라는 필담에선 당시 중국인들이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해 얼마나 무신경했는지 알 수 있다. 그 대답에서는 꼿꼿한 조선 선비의 강단을 엿볼 수 있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문득문득 드는 생각은 19세기 청나라의 모습이나 문화가 아니라 저자에 관한 궁금증이다. 43년 생을 살았다는 기록 외에는 이렇다 할 관직도 인맥도 없던 일개 선비가 어떻게 동아시아 정세를 꿰뚫고 있었으며 문학 · 지리 · 과학 할 것 없이 풍부한 인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을까. 실제로 낯선 땅에 머문 6개월간 최두찬은 청나라 지식인들과 셀 수 없는 필담을 나누었고,거의 매일 중국의 학자들이 그를 보러 방문하고 술자리를 내어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조선의 평범한 선비에게 그들은 왜 그렇게 열광했고,어떤 점에 흥미를 느꼈던 것일까. 19세기 사료로서의 가치는 차치하고,책을 놓을 즈음엔 43세에 요절한 이 남자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남는다.

백승현 기자 arg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