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화 명작기행] 19세기 욕망의 도시 파리는 '패션 아이콘'들로 넘쳐났다

● 장 베로의 '대로에서'…한껏 차려입은 '댄디남' 풍성한 치마의 '차도녀'

2프랑 주고 마차 대여…'이동식 아틀리에' 작업
멋쟁이 파리지앵만 가득…'약자'는 없는 미화된 풍경, 속물근성을 꼬집은 걸까…

말쑥하게 차려입은 한 젊은 신사가 파리 중심가의 대로를 여유있게 산책하고 있다. 흰색 리넨 와이셔츠에 나비넥타이를 맸고 그 위에 조끼와 검정색 외투를 걸쳤다. 외투의 왼쪽 주머니에는 손수건을 살짝 드러내 악센트를 줬다. 머리에는 톱햇(top hat · 실크햇이라고도 함)을 썼고 오른손에는 둥그렇게 휜 손잡이가 달린 검정색 우산을 들었다.

잘 닦은 구두에선 반질반질 윤이 난다. 깨끗하게 면도한 신사의 얼굴엔 여유가 넘쳐흐르며 귀족적인 우아함마저 감돈다. 벨 에포크('아름다운 시대' · 19세기 말~20세기 초)의 화가 장 베로(1849~1935)의 '대로에서'에 등장하는 이 신사는 이른바 '댄디'라고 불린 프랑스 멋쟁이의 차림새를 하고 있다. 댄디란 옷차림과 세련된 언어 및 매너에 특별히 중요성을 부여하는 사람으로 귀족적인 생활양식을 모방함으로써 은연중 자신의 정신적 우월감을 드러내려는 남자를 말하는 데 일명 '보 브러멀(멋진 브러멀이라는 뜻)'로 불린 영국인 조지 브라이언 브러멀(1778~1840)이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옥스퍼드대를 나와 왕궁을 들락거렸던 이 사내는 화장하거나 향수를 뿌리지는 않았지만 늘 몸을 청결히 하고 깔끔하게 면도했으며 머리카락도 말쑥이 빗어 넘겼다. 옷은 몸에 착 붙게 입었는데 빳빳하게 풀 먹인 흰색 리넨 와이셔츠를 착용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공들여 매듭 장식을 한 넥타이로 세련미를 뽐냈다. 그는 무엇보다도 바로 세탁한 옷이 아니면 입지 않았다. 이런 브러멀의 외모 지향적 태도는 의외로 많은 추종자를 낳아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은 브러멀보다도 더 튀는 레이스 장식 패션으로 지적 우월성을 과시하려 했다.

브러멀의 태도는 혁명기의 프랑스 젊은이들마저 매혹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혁명의 과격성에 회의를 품고 있던 보수성향의 젊은이들은 귀족적인 댄디 복장을 착용함으로써 상퀼로트,즉 과격한 공화파와는 다른 자신들의 정치적 입장을 드러냈다. 기성문화와 전통에 반발한 보헤미안도 댄디풍의 옷차림을 통해 사회에 대한 자신들의 분노를 표출했다. 그들은 멋부린 옷차림과 방종한 생활을 통해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자신의 우월성을 표출하려 했던 것이다. 이런 보헤미안적인 태도는 세기말의 상징주의 문학에도 깊은 영향을 미쳐 보들레르는 "거울 앞에서 살고 거울 앞에서 잠자야 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브러멀의 소박하면서도 다소 속물적인 댄디즘은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프랑스에 건너와 정치 · 사회적 맥락으로 고양됐다.

정신적 귀족주의를 지향하던 댄디즘은 특히 경제적 번영을 바탕으로 강한 신분 상승욕구가 분출하던 '벨 에포크'의 프랑스인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댄디풍의 옷차림에 집착했다. 거리에는 적어도 차림새만으로는 신분을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많은 댄디와 유사 댄디가 넘쳐났다. 장 베로의 '대로에서'는 그런 19세기 말의 파리 중심가 풍경을 포착한 것이다.

장 베로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프랑스 조각가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네 살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가족은 파리로 이주했다. 고교 졸업 후 법률학교를 다니던 그는 진로를 바꿔 레옹 보나의 화실에 들어가 화가 수업을 받는다. 보나의 화실은 출세의 등용문으로 통해 귀스타브 카유보트와 툴르즈-로트렉 같은 재능있는 화가들이 기량을 연마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보나는 전통적 화법에 바탕을 둔 보자르의 전통을 고수했기 때문에 인상주의를 비롯한 새로운 화풍에 매혹된 야심만만한 젊은이들에겐 맞지 않는 곳이었다. 베로 역시 그런 야망을 품은 젊은이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인상주의자들의 화법을 부분적으로 따랐을 뿐 대체로 사실적인 재현을 중시한 아카데미의 전통이 자신의 기질에 더 적절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상주의자들이 빛과 색채의 실험을 위해 도시를 빠져나갔을 때 그는 변모하는 세계의 중심도시 파리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더 큰 흥미를 느꼈다. 당시 파리는 오스망 남작의 대대적인 도시계획에 힘입어 사람들의 온갖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볼거리로 가득찬 감각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멋지게 차려 입은 남녀들은 저마다 대로로 쏟아져 나와 느릿느릿 거리를 산책하거나 쇼 윈도를 구경하며 나른한 오후시간을 소일했다. 곳곳에 생겨난 카페는 상류층의 모임장소로 각광을 받았고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들의 은신처가 되기도 했다.

베로가 주목한 것은 이처럼 급속한 변모를 겪고 있던 도시민,특히 파리지앵의 일상생활이었다. 그가 가장 흥미를 느낀 대상은 대로를 활보하는 멋쟁이 댄디였는데 그는 그들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기 위해 '이동식 아틀리에'에서 작업했다. 시간당 2프랑을 주고 마차를 세내 대로변에 세우게 한 후 그곳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멋지게 차려입은 거리의 신사와 숙녀를 세밀히 관찰했다. 19세기 말~20세기 초 한창 때의 파리 모습은 그렇게 화가의 유별난 관심 덕분에 우리에게 전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그린 거리의 모습은 일종의 미화된 풍경이었다. 소외계층에 완전히 등을 돌린 것은 아니었지만 베로의 거리 풍경화 속에서 사회적 약자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그림 속의 파리는 언제나 밝은 표정의 멋쟁이 남녀들로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특별한 목적 없이 거리의 풍경을 살피며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며 금빛 간판과 투명유리로 치장된 쇼케이스를 들여다보며 저마다 욕망의 빈자리를 채우는 데 열중하고 있다.

정신적 귀족주의를 지향한 댄디즘은 때론 시대정신의 전위가 됐지만 실제로는 새로 탄생한 근대 도시 대중의 공허한 욕망을 채우는 겉치레의 도구가 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이 점에서 명품으로 자신의 정신적 허기를 채우려는 오늘의 대중 정서도 세기말 프랑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정석범 < 미술사학 박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