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주의 연극 참맛에 관객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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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차범석 5주기 기념 '산불'"참아요. 참는 수밖에 없어.우린 이날 이때까지 밤낮 참고만 살아왔으니까,잊어버려."
전쟁에 식민지까지 참아낸 여인들도 '과부병'은 참지 못했다. 1951년 겨울 소백산맥 줄기에 묻힌 두메산골.초가집 두 채와 높게 솟은 대나무가 대극장 무대를 꽉 채우고 있다. 6 · 25전쟁이 터지자 남자는 모두 죽거나 떠나고 노망난 김노인과 여자들만 남은 과부마을.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지만 험준한 산악지대인 이곳에는 밤이면 공비들이 활개를 치는 통에 여자들은 공출과 야경에 시달린다. 이장을 맡고 있는 과부 양씨(강부자)와 이웃집 과부 최씨(권복순)는 집안 문제,이데올로기의 골로 전쟁통에도 옥신각신 다툰다. 양씨에게는 정신이 반쯤 나간 딸 귀복이와 참한 며느리 점례(서은경),노망난 시아버지 김노인만 남았다. 최씨에게는 죽은 사위 대신 과부병에 시달리는 딸 사월이(장영남)와 갓 태어난 손녀가 있다.
눈 내리는 밤,점례의 부엌으로 부상당한 규복(조민기)이 숨어들고,점례는 그를 뒷산 대밭에 숨겨준다. 규복은 친구 따라 입산했다가 도망쳐 나온 전직 교사.규복에게 동정심을 품은 점례는 식구들 몰래 음식을 날라다 주며 규복과 사랑을 나눈다. 사월이가 둘의 밀회장면을 목격하면서 상황은 급반전된다. 그는 규복을 점례와 동시에 차지하려 한다.
'산불'(사진)은 비극적인 전쟁 속의 현실을 두 집안의 갈등과 2대로 이어진 과부의 운명을 한탄하는 세대 갈등,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암투를 벌이는 점례와 사월이의 갈등까지 다층적인 관계를 보여준다. 과부들은 각자의 사연과 설움을 토로하며 눈시울을 적신다. 점례의 밀애를 목격한 사월이가 정욕에 타오르는 시선으로 "점례에게 소중한 남자는 내게도 소중하니까. 나도 그 남자를 돕고 싶어.나도 그이에게 밥을 해주겠어.점례 혼자선 짐이 무거울 테니까"라는 대사를 읊는 순간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린다.
베테랑 배우 강부자와 권복순은 물론 젊은 과부 역의 서은경과 장영남은 자신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해 연기력의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다. 귀복과 김노인의 감초 연기도 극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국 사실주의 연극의 최고봉'이라 불리는 차범석의 희곡 '산불'은 올해로 무대에 올려진 지 49해.원작에 충실하고자 했던 임영웅 연출의 이번 무대는 초 · 중반까지 다소 단조로웠다. 무대 전환이나 효과음 없이 막 전환을 위해 암전 때마다 라이브 음악이 연주된 것만이 달랐다. '대작 연극'을 기대하고 왔다가 다소 실망하는 관객들의 마음은 불꽃이 벌겋게 일렁일 때 '감전'된다. 초가집 두 채와 대숲이 붉게 타오르며 하얀 연기로 배우와 관객을 뒤덮을 때 왜 그동안 무대가 저토록 정적으로 놓여져 있었는지 알게 된다. 점례가 규복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과정과 사월이에게 들킨 후 번뇌하는 내면을 좀 더 깊숙하게 건드리지 못한 점은 아쉽다. 남편이 살아있을 거라는 희망을 갖고 살던 점례가 어느 순간 규복과 함께 누워있는 것을 보며 관객들은 의아해했다. 사건 발단의 핵심 장소인 대숲도 더 입체적으로 만들었다면 초가집과 대비돼 대극장 무대의 장점을 활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2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1만~7만원.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