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TC 창설 50년] "인사ㆍ자재관리 軍에서 많이 배웠지…기업보다 앞서 있었거든"

● 선·후배 간 대화의 자리

손길승 SK텔 명예회장 (1기)
조직에 헌신해야 인정 받지, 리더십도 갖추고…나는 ROTC서 그걸 배웠어

구학서 신세계 회장 (8기)
원래 숫기가 없었는데 매일 소대원 앞에서 얘기…성격도 바뀌더군

윤상규 네오위즈 사장 (32기)
지시·통제하는 것보다 큰 형처럼 대해야 잘 돌아가…창업할 때 많은 도움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자,학생군사교육단(ROTC · Reserve Officers Training Corps) 창설 50주년을 맞는 달이기도 하다. 한국경제신문은 ROTC 출신 기업인들이 학군사관후보생들을 만나 군에서 배운 리더십을 들려주는 'ROTC 선후배 간 대화'를 마련했다.

8일 서울 용산동 전쟁기념관에서 진행된 만남에는 ROTC 1기인 손길승 SK텔레콤 명예회장 겸 전경련 명예회장(70)과 구학서 신세계 회장(8기 · 65),네오위즈게임즈의 윤상규 사장(32기 · 40) 등 3명이 선배로 참석했다. 후배 사관후보생으로는 4학년인 이동욱(국민대 사회학과),이영환(서울대 경제학과) 씨와 올해 첫 여성 ROTC 후보생이 된 3학년 김재령(영남대 독문과),이예지(명지대 법학과),조수연(강원대 분자생명학과),최유리(고려대 역사교육학과) 씨 등 6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동욱=선배님들의 지원 동기가 궁금합니다. 손 명예회장님은 첫 번째인 1기이신데요.

▼손길승 명예회장=장교생활을 꼭 해보고 싶었던 데다 ROTC 하면 딱 2년만 훈련받아도 된다고 해서 지원했지.훈련받으면서 고생 많이 했지.M1 소총을 입에 물고 기합도 받고.지금이야 소총이 가볍지만 그때는 우리 몸무게만큼 무거웠어(웃음).고생을 이겨낼수록 자신감과 도전의식이 생기더라고.우리는 1기라 주변의 시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어.경리학교 교관을 했는데 낮에는 고급장교들을 가르치고,저녁에는 본부중대 직무대행하느라 밤낮으로 1인3역을 열심히 했던 것 같아.

▼구학서 회장=6남매 중 장남으로 군을 빨리 마치고 가계에도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ROTC를 선택했지.임관 후 첫 1년은 소대장,나머지 1년은 연대 참모로 인사장교를 했지.원래 숫기가 없는 성격이었는데 교육사단(경기도 포천군 이동면)에서 소대장을 하면서 매일 50~60명 앞에서 얘기를 하다보니 성격도 바뀌더라고.군대는 인류 역사와 같이 시작된 조직이야.행정이 기업보다 앞선 것이 많았어.군대는 문서를 만들 때부터 보관 기한을 정해 관리하지.이런 점에서 기업을 보면 아직도 엉망이야.첫 직장으로 삼성전자에 들어와 1980년쯤 회사에 불이 났을 때 자재부서에선 이제부터 재고 관리를 제대로 해보자며 만세를 불렀을 정도니까. 공군에서 자재관리 맡았던 사람들을 데려다가 자재과장에 앉혔었지.▼이영환=삼성이 ROTC 공채를 부활한다고 하던데요.

▼구 회장=ROTC 채용을 가장 먼저 한 게 삼성이에요. 1973년 9기생 때부터 했거든.이기태 전 삼성전자 부회장,이상대 전 삼성물산 부회장,이수창 전 삼성생명 사장 등이 모두 삼성 장교 공채 1기야.삼성이 장교 공채를 부활한 것은 군 장교 경력이 기업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거지.

▼윤상규 사장=제 경우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성격을 바꿔보겠다는 생각에 지원하게 됐어요. 1년차에 훈련을 받으면서 고생할수록 자신감이 생기고 도전의식이 커지는 느낌이 들더군요. 춘천에서 전투복 등의 물자를 관리했는데 하루 종일 부대원들과 짐 싸고 풀고 숫자 맞추는 일을 했어요. 그러면서 '지시하고 통솔하는게 아니라 큰형처럼 일을 해야 돌아가는구나'하는 걸 배웠어요. ROTC를 하면서 얻은 도전 의식과 자신감이 창업할 때 많은 도움이 됐어요. 전공(경영학)과 무관한 게임업체를 창업할 수 있었던 것도 '실패하면 또 하면 되지'라는 도전의식이 큰 힘이 됐어요. ▼이영환=ROTC 장교 경험이 기업 경영에서 어떤 도움이 됐나요

▼손 명예회장=군에 있을 때 사병들에게 가야할 보급식량을 장교,하사관들이 가져가는 문제가 있었어.그래서 내가 이걸 철저히 막았지.그렇게 했더니 사병은 먹는데 부대가 안 돌아가는 거야.하루는 하사관 한 명이 숙소로 찾아와서 "원칙대로 하는 것이 맞지만 우리는 생활이 안 된다"고 해서 어떻게 하면 원칙을 지키고 요구 조건을 들어줄 수 있을까 생각을 했지.그래서 외출하는 병력의 식사를 돌려 하사관들에게 보냈어.그렇게 하니 일이 풀리더라고.회사 생활에서도 윗사람의 인사청탁이 내려오면 '이걸 안 들어주면 그분의 사회생활이 안 되겠다'싶은 것 딱 하나만 들어주지.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디자인한 인사안을 관철시킬 수 있게 돼.이상을 추구하되 현실과의 적절한 조화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해요.

▼구 회장=제대 후 입사 면접을 볼 때 희망 부서를 묻는 질문에 인사부서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했지.인사장교의 경험을 살려 군의 인사시스템을 적용해보겠다는 생각이었어.삼성전자만 해도 교육이 잘 안돼 있던 때야.지금은 회사에서 직급별,직능별로 교육을 하고 있는데 이런 제도를 만들 때 군시절의 경험을 많이 활용했어.당시엔 군이 앞서있는 것이 많았지.예전엔 고시 패스하고 나면 교육은 끝이었지만,군에서는 꾸준히 교육을 했어.기업이 군에서 배울 것이 굉장히 많아.▼이예지=장교로 복무한다면 군생활을 할 때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지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손 명예회장=나는 모든 조직에서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해.그래야 인정을 받아.군은 자기의 목숨을 내놓고 하는 곳이지.전쟁이 일어난다든지 비상사태가 일어나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을 정도의 각오가 있어야 해.그런 치열함을 가지고 사회에 나오면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게 돼있어.

▼조수연=군 간부로 근무하셨다가 사고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여군의 길을 지원했습니다. 대기업의 리더로서 여성 ROTC에 대한 기대가 어떤지 알고 싶습니다.

▼손 명예회장=훌륭한 지도자가 나와야 위대한 국가가 될 수 있어.세계 역사를 보면 그래요. 영국이 세계적인 나라가 된 것은 엘리자베스 1세가 나와서 스페인을 정복한 덕이지.여성 ROTC를 염원했는데 참 잘했다고 생각해.군 생활 동안 국가관을 잘 세워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나는 전 국민이 군대에 다녀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스라엘처럼 여성도 모두 군에 갔다 와야 대한민국의 힘이 더 커질 것이고 선진국이 되는 것도 쉬워진다고 생각해.

▼김재령=구보할 때 남자 후보생들에 비해 처지긴 하는데 그래도 포기를 안 하고 따라간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군에서 여상이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분야는 무엇일까요.

▼구 회장=우리 때는 여사원들의 업무가 책상 닦고 커피 심부름하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달라졌어.자칫 그런 질문 자체가 차별을 원하는 걸로 잘못 비쳐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유통업에서는 과거에는 바이어는 남자만 했지만 이젠 직무 구분이 없어졌어요. 제일 차별이 없는 직종 중 하나가 바로 군대에요. 군대는 공정하게 실력만 있면 진급할 수 있기 때문에 (여성들에게도) 혜택이 가면 갔지 불리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나도 참모총장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해봐요.

▼손 명예회장=나는 여자 후배들에게 보병을 권하고 싶어.그게 지휘관으로 가는 길이야.

▼최유리=좋은 리더십을 키우기 위해 꼭 봐야 할 책이나 롤 모델은 무엇일까요.

▼윤 사장=역사책이나 중국고전을 추천합니다. 삼국지를 보면 여러 인물에 대한 전형이 담겨 있죠.유비,관우,장비뿐만 아니라 조조,손권,주유 등에서 다양한 리더상을 접할 수 있어요.

▼손 명예회장=책 얘기하면 이순신 장군이 떠올라요. 지휘자로서의 덕목은 역시 헌신이죠.자기가 먼저 헌신을 하면 팀은 따라오게 마련이야.지휘자로서의 우월감을 가지면 안되고 자기가 희생하면 돼.▼구 회장=조직에서 중요한 것은 구성원들의 장점을 살리는 것이지.그런데 단점이 먼저 눈에 들어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좋은 것이 없어 보여.장점을 살려서 해볼 때 조직이 나아갈 수 있어요.

윤성민/조재희 기자 smy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