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사 뒤집어 읽기] 대기근, 19세기 수천만명 아사…엘리뇨ㆍ제국주의 '합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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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기상이변 가뭄ㆍ홍수 잇따라
제국주의 침탈로 구호시스템 붕괴
인도ㆍ중국선 인육 버젓이 팔기도
19세기 후반은 전 지구적 재난의 시기였다. 한꺼번에 그렇게 광대한 지역이 재해를 입은 사례는 없었다. 1876~1879년과 1889~1891년에 세계 여러 지역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한반도를 비롯 인도 브라질 러시아에 기근이 심했고,에티오피아와 수단에서는 인구의 3분의 1이 사망할 정도로 사정이 처참했다.
1896~1902년에는 열대지방 전역과 중국 북부에 계절풍이 불지 않는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이때 말라리아와 페스트,이질,천연두,콜레라 등 전염병이 창궐해 이미 기근으로 약해진 수백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 시기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기상학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 열대 동태평양 지역의 급속한 가온(加溫) 현상은 아시아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북동부 전역에서 계절풍 약화와 가뭄을 발생시킨다. 이를 엘니뇨현상이라 한다. 반대로 동태평양이 비정상적으로 냉각되면 이 현상이 역전돼 '원격 연계'된 지역들에서 비정상적인 강수 현상과 홍수가 발생한다. 이것이 라니냐현상이다.
인도양까지 포괄하는 광대한 지역에서 엘니뇨와 라니냐 두 현상이 연계돼 차례로 반복되는 시소 현상을 엘니뇨 남방 진동(El Nino-Southern Oscillation),간단히 줄여서 ENSO라 한다. 19세기 후반 일련의 사태는 최근 500년 중 가장 강력했던 ENSO 사태의 결과로 보인다.
문제는 이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으로 끝나지 않고 인간의 문제와 연관돼 더욱 악화됐다는 점이다. 19세기 후반 세 차례에 걸친 가뭄과 기근,질병의 파고 속에서 최소 3000만명에서 5000만명까지 사망한 것으로 추산한다.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희생된 것은 사회안전망의 파괴와 약탈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어느 사회든 정말 예외적으로 거대한 재앙이 닥친 게 아니라면 사람들이 대량으로 굶어죽을 만큼 곡물이 부족한 경우는 없다. 어딘가에 식량이 있지만 적절하게 사용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그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분명 제국주의였다. 19세기 후반 유럽 국가들과 일본은 천재지변의 사태를 악용해 공유지를 몰수하고 농장과 광산에서 일할 노동력을 싼값에 구하는 식으로 식민지를 강탈했다. 제국의 영광의 이면에는 처참한 식민지 상황이 놓여 있었다.
인도의 사례를 보자.인도의 철도는 기근을 구제하는 치유책이라 선전했지만 실제로는 기근을 더 악화시켰다. 곡물상들은 굶주리는 사람들을 외면하고 곡물을 해외로 수출했다. 1877~1878년 인도에서 유럽에 수출한 밀은 32만t으로 사상 최대였다. 당시 굶어죽은 사람의 시체를 먹는 들개만이 이 지역에서 제일 살찐 동물이었다.
국내에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인근 지역의 식민지 경제 발전으로 노동력 수요가 발생하자 많은 사람들이 쿨리(苦力 · 노동자)가 돼 해외로 떠났다. 쿨리들의 선상 식사량은 하루 쌀 570g,부식 450g에 불과해 2차대전 때 악명 높은 부헨발트 수용소의 규정 식사량보다 적은 상태였다. 마이소르 지방에서는 오직 공포정치로써만 질서를 유지했다. 굶주린 사람들이 들판에서 이삭을 줍다가 잡히면 낙인이 찍히고 코를 베이거나 살해당했다. 미친 사람이 시체를 파먹거나 사람을 죽여 삶아먹는 현상이 일어났다. 결국 주민들이 지주와 촌장을 공격해 가족들을 살해하고 곡물 창고를 약탈했다.
오랜 가뭄 끝에 마침내 비가 와서 농사가 어느 정도 회복됐을 때 그 동안 체납된 세금을 걷기 위해 데칸 고원에서 군사 작전이 벌어졌다. 그동안 버텨왔던 사람들에게 이것은 최후의 일격이 됐다.
황하 유역에서도 수백만 명이 아사했다. 사람들은 지붕 이엉으로 쓰인 썩은 고량 줄기를 먹으며 버티다가 나중에는 아이들을 내다 팔아 식량을 구했다. 마을 사람들이 지하 동굴에 모여 살다 차례로 죽어갔다. 산시성(陝西)의 큰 현에서는 10만~20만명이 사망했고 작은 현에서도 5만~6만명이 죽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 넣는 것이었다. 그 구덩이들은 만인묘(萬人墓)라 불렸다. 부모들이 포기한 아이들은 비밀 장소로 옮겨져 잡아먹혔다. 사람 고기가 노상에서 공개적으로 판매됐다. 부모들은 친자식을 잡아먹을 수 없어서 다른 가족과 아이들을 교환했다. 산 사람을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인도와 중국에서 피해가 이토록 엄청나게 커진 것은 마을과 국가의 구호체계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청나라 전성기 때 국가의 구호체계는 대단히 훌륭했다. 1743~1744년 엘니뇨 때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 시절 피에르에티엔 빌이라는 외국인이 중국의 구호체계를 기록한 바 있다. 흉년이 들자 관리들은 즉각 곡물 창고에서 식량을 꺼내 농민들에게 지급했다. 해당 지방의 곡물 비축분이 충분치 않자 대운하를 이용해 남부 지방에서 대량의 쌀을 수송해 왔다. 당시 청나라 정부는 8개월 동안 200만명의 농민을 부양했다. 같은 기간 유럽에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사망한 것과 비교하면 중국이 유럽보다 훨씬 나은 구호체계를 갖추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19세기 후반에 특히 아시아 지역에서 수많은 아사자가 나온 것은 국가 시스템이 붕괴됐기 때문이다. 엘니뇨현상만으로 처참한 비극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으며,제국주의의 침탈과 그에 동반한 국가기구의 능력 상실이 피해를 키운 것은 분명하다. 흔히 막대한 피해를 입은 상황에 대해 천재(天災)이자 인재(人災)라고 이야기하는데,19세기 후반의 대재앙이야말로 글로벌 차원에서 벌어진 천재 겸 인재였다.
주경철 <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