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래소, 부실 회계법인 '블랙리스트' 공개

먹튀 돕는 뻥튀기 회계·폭탄 돌리기 근절 나서
상장사에 통보…법적 구속력 없지만 파장 클 듯

한국거래소가 1750여개 상장회사에 대한 회계법인의 부실 감사를 직접 단속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부실 감사 혐의가 드러난 회계법인을 별도 분류하는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활용키로 했다. 회계법인이 저축은행 비리의 공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가운데 갖가지 부실 감사와 회계 부정이 증시의 물을 흐리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블랙리스트 만들어 공개할 것"한국거래소 고위 관계자는 9일 "부실 회계로 인한 투자자 손실과 시장의 신인도 추락 등을 볼 때 거래소가 뒷짐만 지고 있을 수 없는 상황"이라며 "앞으로 부실 감사 등이 적발된 회계법인의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별도 관리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래소는 부실 감사 행위가 적발된 회계법인의 '블랙리스트'를 상장사들에 직접 통보할 방침이다. 이렇게 되면 상장사들은 해당 회계법인 이용을 꺼릴 수밖에 없다. 비록 법적인 구속력을 갖는 것은 아니지만 블랙리스트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게 거래소의 설명이다.

한국거래소가 회계법인 '블랙리스트'를 만들기로 한 것은 회계 관련 비리가 줄지 않고,수법도 갈수록 정교해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거래소 관계자는 "최근 1~2년간 금융위원회가 적극 단속에 나섰지만 회계 비리는 줄지 않고 있다"며 "회계사의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정성평가 등의 위법 여부를 입증하기 힘든 데다 2년 직무정지 등의 징계를 당해도 뒷돈 등 수입이 만만치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먹튀' 돕는 뻥튀기 회계 부정

부실 회계는 코스닥시장에서 특히 심하다. 부실 회사의 우회상장이나 대주주가 주가를 끌어올린 뒤 차익을 챙기고 빠져나오는 이른바 '먹튀'를 도와주는 회계법인이 상당하다. 우회상장 당시엔 멀쩡했으나 상장 이듬해 감사의견 거절을 받아 상장폐지된 네오세미테크와 지노시스템이 대표적이다.

상장사의 최대주주와 회계사가 결탁해 가장 많은 돈을 챙길 수 있는 부분은 비상장사 가치평가를 통해서다. 상장사가 비상장사를 인수하면서 인수가격을 뻥튀기한 뒤,실제 가치와의 차액을 빼돌리는 수법이다. 이 과정에서 회계사는 부풀려진 비상장사 가치를 검증하는 방식으로 횡령에 가담한다. 지난해 상장폐지된 '벤처 1세대' 핸디소프트가 단적인 예다. 핸디소프트 최대주주는 친동생을 동원해 2009년 몽골의 구리광산개발회사를 단돈 100만원에 인수한 뒤 핸디소프트의 사내유보금으로 광산회사를 사들이는 방법으로 회사자금을 횡령했다. 지분 51%를 인수하는 데 쓰인 돈은 290억원.100만원에 인수한 회사 가치가 568억원까지 부풀려졌지만 가치평가를 맡은 회계법인은 해당 가치를 인정해 횡령을 도왔다. ◆분식회계 방관하는 회계법인도 상당수

회사의 분식회계를 알면서 눈감아주는 경우도 많다. 신풍제약은 2009년부터 매출채권을 107억원 과대계상해 자산을 늘리고 대손충당금을 6억원 과소계상하는 분식회계를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이로 인해 자기자본이 161억원 부풀려졌다.

유비프리시전은 빌려준 돈에 대한 담보가치를 과대평가하는 수법으로 대손충당금을 59억원 적게 반영한 사실이 작년 9월 적발됐다. 이에 따라 2008년 순이익은 32억원 흑자에서 26억원 적자로,2009년은 22억원 흑자가 37억원 적자로 탈바꿈했다. 회계업계 관계자는 "매출채권과 대손충당금의 적절성은 회계감사의 가장 기본적인 부분으로 담당 회계사가 몰랐다고 보기 어렵다"며 "채권의 가치평가에는 주관적인 의견이 반영되는 만큼 회계사가 회사의 요구에 따라 분식을 묵인했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분식을 눈감아주는 과정에서 '폭탄 돌리기'도 일어난다. 상장폐지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감사의견 거절 표명에 부담을 느낀 회계사들이 3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뒤 다른 회계법인이 감사를 맡을 때까지 거절 의견 표명을 미루는 방법이다. 이 과정에서 소액투자자들만 피해를 입게 된다.

손성태/노경목 기자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