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불능 난삽한 詩는 가라…"짧고 간결한 抒情이 참맛"

극서정시집 나란히 펴낸 유안진ㆍ오세영 씨
"난해하고 정신분열적인 우리 시(詩)의 자해성 때문에 시가 소멸되는 단계에 이른 것 같습니다. 일단 시선을 끌면 시도 상품처럼 팔 수 있다는 생각은 결국 허상이 아닐까요. "(오세영 시인) "현대시는 과거처럼 삶의 교본이 아니라 '언어 예술'로 더욱 인식돼요. 의미와 형식의 끊임없는 시도가 없다면 시집을 왜 내야 하는 거죠."(유안진 시인)

1960년대 중반 비슷한 시기에 등단한 유안진 시인과 오세영 시인이 16일 낮 서울 인사동에서 만났다. 대학 시절부터 친구였던데다 서울대 명예교수이기도 한 두 시인은 각기 새 시집 《둥근 세모꼴》과 《밤 하늘의 바둑판》(서정시학 펴냄)을 출간했다. 이들은 조정권 이하석 최동호 시인이 '언어의 경제학을 지향하는 비교적 짧은 형태의 서정시'라는 뜻의 '극서정시(極抒情詩)'를 표방하며 지난 3월 '서정시학 서정시' 시리즈를 출간한 이후 두 번째 시집을 펴낸 주자다.

시집 《그것들》을 함께 펴낸 김종길 시인은 이날 개인 사정으로 함께하지 못했지만,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최동호 고려대 국문과 교수(서정시학 주간)와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가 참석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오 시인은 "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인간의 삶을 더 가치있는 방향으로 향상시키는 데 기여해야 한다"며 "요새 상당수의 시들은 상품 마케팅과 같은 전략을 쓰면서 충격,해체,자해,폭력,패륜과 같은 방식의 시선끌기에 몰두하는 건 아닌가 우려된다"고 비판했다. 그는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남편이 아무 아파트나 들어가 아내를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며 "영원성과 보편성을 추구하는 시는 어떤 형태로도 상품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방민호 교수도 오 시인의 지적에 동의했다. "한층 복잡해진 현대사회에서 시의 기능이 옛날과 달라졌죠.똑같이 복잡한 형식을 통해 현실에 다가갈 수도 있고,반대로 단순하고 투명하게 본질을 꿰뚫어 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오늘날의 많은 시들은 어느 방식도 아닌,혼란 속에 휘말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어떤 시는 평론가인 저도 몇 줄을 못 넘어갈 만큼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

유 시인은 보다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시인 개개인의 변화와 노력을 촉구했다. 그는 "화가 앤디 워홀처럼 지금의 시들도 훗날 더 새로운 의미와 가치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라며 "다만 중요한 것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읽히는 시를 쓰는 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에 나서는 독창적인 시인들의 역량"이라고 얘기했다. 극서정시는 소통불능의 난삽한 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이번 시집을 통해 유 시인은 위트 넘치면서도 깊은 성찰의 결과를 선보이고,오 시인은 자연을 살아있는 생명체의 본질과 접목하면서 각기 정갈하고 명징한 시세계를 펼쳐 보였다.

'뱀보다는 아무래도 더 멍청하니까/ 자기 갈비뼈를 돌려달라고 할까봐/ 조강지처의 의리와 자존심 때문에/ 이 밖에도 뭔가 더 있을 것 같은데.'(유안진 '이브는 왜 아담에게 돌아갔을까?' 부분)

'농부는 과감하게 대지를 쓰러뜨리고/ 쟁기로/ 그녀의 푸른 스커트의 지퍼를 연다. / 아,눈부시게 드러나는/ 분홍빛 속살,/ 삽과 괭이의 그 음탕한 애무,그리고/ 벌린 땅속으로 흘리는 몇 알의 씨앗.'(오세영 '푸른 스커트의 지퍼' 부분)최동호 교수는 "(서정시학 시리즈) 권당 9000원짜리 시집을 1000부씩 찍어 상업적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면서도 "다만 '미래시'나 '해체시' 등이 주류를 이루면서 더욱 어려워진 독자들과의 소통 경로를 열어보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혜정 기자 selenm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