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전준엽 "'마음의 빛'으로 그리는 眞景山水…찰나의 느낌까지 담아내죠"

● '빛의 화가' 전준엽 씨

미술학원서 첫 스승을 만나다
대학 땐 목가적 분위기 그림 그려…80년대 極사실주의 전환 현실 참여

민중미술서 순수미술로
6·10항쟁 계기 회화의 한계 절감…우리 그림 성찰·'빛과 자연' 천착

한국적 미감의 형상화
내용·논리보다 감성 충실해야 감동…산수화 현대에 접목 '풍경'으로 소통

"일본 긴자에서 전시회를 열었을 때였습니다. 30대 초반쯤 된 여자가 날마다 전시장에 찾아와 한참 동안 그림을 보다 돌아갔어요. 열흘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점심시간에 찾아왔죠.마지막 날도 그랬습니다. 몇 번이나 머뭇거리던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내더군요. 근처 백화점에 근무하는 점원인데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지만 돈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작품값은 40만엔 이상이고 자기 수중엔 30만엔밖에 없다면서….전 흔쾌히 그림을 줬죠.그 사람이 지금도 연락을 해 와요. 벌써 10년이 됐네요. "

'빛의 화가'로 불리는 전준엽 씨(58)의 그림을 사는 사람들은 이렇게 애틋하다. 개인전이나 아트페어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망설이다 한 점을 구입한 뒤 꼭 다시 찾아온다. 2005년 국내 전시에서는 한 미용실 직원이 그의 그림을 '날마다 눈에 품다가' 어렵사리 사 갔다. 그는 이들 덕분에 새로운 열정과 사명감으로 자신을 담금질한다. 지금까지 팔린 그의 작품은 800여점.이 가운데 100여점은 일본,50여점은 미국,50여점은 파리 뮌헨 등 유럽지역에서 판매됐다. 국내에서 팔린 것은 600여점.

"여태까지는 기업이나 대규모 화랑보다 개인이 많이 사 갔어요. 그들의 소개로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요. 미리 제 그림의 분위기와 정서를 이해하고 오기 때문에 매매 체결률도 높지요. 그래서인지 한 사람이 3점 이상 갖고 있는 경우가 많아요. "

서울 인사동 더케이갤러리에서 오는 22일까지 계속되는 그의 전시회를 찾는 사람들도 대부분 그렇게 시작해 '전준엽 마니아'가 된 단골이다. 우리나라의 산수 풍경을 주로 그리는 그의 작품에는 '빛의 정원에서'라는 제목이 달려 있다. 거의 20년째 이어져 온 시리즈 제목이다. 왜 '빛'과 '정원'일까. "빛은 물리적인 광선이 아니라 정서적인 코드의 '희망'을 의미합니다. 우리나라 만족성에 기반한 정신의 표상이죠.한국적인 미감이 밝음에서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정원'은 우리의 땅과 풍토,정신적인 마당을 상징합니다. "

작품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나무도 마찬가지다. "여행 중 만난 소나무의 느낌을 그대로 그리려 했습니다. 산꼭대기 절벽의 소나무는 기막힌 소재죠.스스로를 강하게 드러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레 그 자리를 밝히는 빛의 이미지로 남거든요. "

그가 산수풍경에 빠진 것은 1990년대 중반부터다. 그 전에는 고구려 고분벽화 같은 반추상 이미지에 집중했고,더 젊었을 땐 극사실화에 천착했다. "산수는 우리 정신문화의 근간입니다. 서양문화가 유입되기 전에는 회화의 70%가 풍경화였잖아요. 자연환경이 뛰어난 나라에서 풍경화가 발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가장 중요한 건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입니다. 서양의 풍경화와 우리 산수화가 구별되는 것도 바로 시선의 차이죠.인본주의적 휴머니즘의 서양 풍경화는 그걸 그리는 사람의 시각이 주체인데 동양의 산수화는 그리는 사람의 뜻이 중심이에요. 겸재 정선의 풍경화처럼 입체적인 '다시점(多視點) 화법'이 대표적이죠."

'다시점'이란 그리는 사람의 시선을 다양한 위치에 놓는다는 것,대상인 풍경에 자신의 심상을 투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특정한 것을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새와 바위,꽃과 같은 '보통명사'다.

"제가 좋아하는 낭만주의 시대의 서양화가 카스파 프리드리히는 인물의 뒷모습만 그렸어요. 마음속 이상향을 제시하는 거죠.우리의 산수화 기법과 닮았습니다. "그의 그림은 시점이나 구도에서 동양적 특징이 잘 드러나지만 제작 과정에서는 동서양의 기법이 두루 활용된다. 먼저 질감을 위해 캔버스에 흰색으로 다섯 차례의 밑그림을 그린 후 사포로 다듬는다. 그 위에 물감을 떨어뜨린 뒤 입김으로 불거나 캔버스를 흔들어 색을 스며들게 하고,바위와 나무 등의 형태를 원액물감으로 두껍게 발라 또 사포로 갈아낸다. 거기에 물감을 덮어 나이프로 긁어낸 다음 사물의 색을 촘촘하게 밀어넣는다. 이 과정이 모두 끝나면 전체를 검정색으로 덮고 면도칼로 긁어내 고유의 질감을 살려낸다.

작품 한 점을 완성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최소 한 달.그린다기보다 만들어가는 조형에 더 가깝다. 칠하고 말리기를 반복하는 '발효의 과정'에서 은은한 발색의 미감이 최고조로 살아난다. 그의 작품을 사 간 사람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좋아지는 그림"이라고 말하는 연유도 여기에 있다.

"오감으로 느끼는 경치를 담기 위해 바람과 물,흙냄새까지 담으려고 노력합니다. 서양 풍경화가 실경산수(實景山水)라면 동양 풍경화는 진경산수(眞景山水)죠.진경은 경치 속에 있을 때의 느낌까지 담아내는 겁니다. 가령 여기 '장맛비'라는 작품 속의 빗소리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갈필로 재빨리 획을 그어야 해요. 그래야 시각과 청각이 함께 빛나거든요. "

그는 어릴 때부터 화가의 재능을 타고난 게 아니라고 말했다. 초 · 중학교 때 크고작은 미술대회에서 상도 받았지만 별 생각 없이 지내다 고교 진학을 앞두고 진로문제로 고민하면서 본격적으로 화가를 꿈꿨다는 것.

"넉넉하지 않은 가정형편 때문에 걱정했는데 뜻밖에 아버지의 적극적인 권유로 미술가의 길을 택하게 됐죠.아버지는 못 이룬 예술가의 꿈을 저에게 기대했나 봐요. 하지만 고교 1학년 때 사춘기를 맞으며 1년가량 방황했습니다. 휴학하고 절에 들어갔다가 스님의 만류로 결국 돌아왔지요. 이후 미대 진학을 준비했습니다. 그때 미술학원에서 만난 스승이 유명한 서양화가 최쌍중 선생님이었어요. 중앙대 입학 후 초기엔 선생님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죠.그 덕분인지 1학년 때 '목우회 공모전'에서 상을 받았습니다. "

그러나 그 방식으로는 스승의 그림자를 넘을 수 없다는 걸 깨닫고 그는 고심 끝에 군에 입대했다. 제대 후 자신만의 조형 방식을 찾기 시작하면서 극사실주의 회화로 현실문제를 중시하게 됐고,졸업한 뒤에는 이념적 · 정치적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중앙대 학생들을 주축으로 한 '임술년그룹'과 서울대의 '현실과 발언',홍익대의 '두렁' 등 민족미술 주체들과 함께 활동했다.

"그런데 1987년 6 · 10 항쟁을 계기로 민족미술에 대한 회의에 빠졌어요.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신문에 실린 한 장의 사진이었죠.분신자살 장면을 담은 흑백사진이었어요. 망점으로 이뤄진 한 장의 흑백 보도사진이 주는 충격과 아우라로 인해 회화의 한계를 느끼게 됐죠.그러면서 그림에 대한 성찰,빛과 자연에 대한 이해,순수미술로의 전환을 이루게 됐습니다. "

그는 자신의 작업이 내용이나 형식 면에서 우리 미술계의 유행에 비춰 진부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평면을 고수하고,재료도 유화를 쓰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술이 형식이나 논리,아이디어보다 감성에 충실해야 감동을 줄 수 있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배짱 있게 밀고 나갈 수 있다고 했다. '빛의 정원에서' 시리즈를 통해 궁극적으로 그가 추구하는 것도 우리 미감의 형상화다. 그는 또 "회화야말로 '눈으로 소통하는 마음의 언어'라고 했다. "사람들의 마음이 모두 다르듯 언어도 다릅니다. 자신만의 고유한 어투와 내용이 강한 인상을 남기지요. 회화에서는 이를 독창성이라고 말합니다. 지금은 똑같은 소리의 세련돼 보이는 함성이 세상을 끌고 갑니다. 그래도 아직은 작지만 제 소리로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만난 사람 = 고두현 문화부장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