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도박병'에 걸린 현대차 노조

"아무리 근로현장 기강이 해이해졌다고 해도,생산현장에서 도박판을 벌인다는 게 말이 됩니까. " 현대차 울산공장의 김모 조합원(38)은 "근로자들이 도박병에 걸려 있다는 사실이 해외시장에 알려지지 않을까 생각만 해도 숨이 막힌다"며 분통을 떠뜨렸다.

최근 현대차 내부 감사에서 100여명의 노조원들이 근무시간 중 사이버 도박을 벌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생산현장은 벌집 쑤셔놓은 듯한 분위기다. 더욱이 전 · 현직 노조 간부들이 도박판에 앞장선 것으로 확인되면서 일반 노조원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고 있다. 불과 두 달 전에도 노조 간부들이 원룸을 돌며 판돈 3억원의 상습 도박판을 벌이다 경찰에 붙잡힌 적이 있다. 2년 전에는 아산공장 노조 집행부가 일부 노조 간부들의 도박에 책임을 지고 총사퇴했다. 노동전문가들은 "1987년 노조 설립 이래 강성 줄파업을 통해 무소불위의 노동권력을 확보하면서 회사 측의 통제력이 상실되고,노조 스스로도 자정기능을 잃으면서 비롯된 총체적인 도덕적 해이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경찰도 회사로부터 직원 명단을 넘겨받는 등 생산현장 내 도박병 근절을 위한 수사에 들어갔다.

일반 조합원들 사이에서는 "이번 사태를 계기로 생산현장에서 일 안하고 월급 받아가는 '짝퉁' 노조 간부들이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상황이 이런데도 강성 현장조직들은 근로시간면제제도(타임오프) 저지를 위한 총파업에 즉각 나서지 않는다며 노조 집행부를 '무능'노조로 몰아붙이고 있다.

하지만 이경훈 노조위원장은 최근 노조 소식지를 통해 "과연 현 시점에서 총파업 투쟁을 할 수 있을지 회의적"이라고 솔직한 심정을 드러냈다. 이미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쟁의행위가 가결된 상태에서 그가 이 같은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번 도박사태가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노동계로는 최초로 케이블 TV광고를 통해 배부른 노조,귀족 노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노력도 이번 사태로 상처를 입었다. 이런 마당에 기득권 보호를 위해 또다시 총파업을 외치는 현장 노조활동가들의 요구는 스스로의 몰락을 재촉할 뿐이라는 지적이 많다.

하인식 울산/지식사회부 기자 hai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