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필리버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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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미 의회에 민권법안이 상정되자 스트롬 서먼드 상원의원이 연단에 올랐다. 민권법을 반대한다는 요지였으나 별 상관 없는 내용의 연설이 이어졌다. 나중엔 전화번호부를 펴들고 읽어내려갔다. 무려 24시간8분 동안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사전 준비도 철저했다. 사우나에 가서 몸 안의 수분을 쫙 빼냈다. 발언 중엔 비서가 양동이를 들고 대기했다. 합법적 수단으로 의사진행을 방해하는 필리버스터(filibuster)의 최장 기록이다.
작년 말엔 버니 샌더슨 미 상원의원이 8시간37분간 연설했다. 오전 10시30분 "감세 연장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지만 '몇 마디'는 해가 뉘엿뉘엿 져서야 끝났다. 의원들은 하나둘 의사당을 빠져나갔고 보좌관과 서기,일부 방문객만 남았다. 연설을 마친 샌더스 의원은 "지쳤다"며 의사당을 떠났다. 2009년 이스라엘 야당의원들은 새 예산법을 놓고 21시간 동안 릴레이 연설을 강행했다. 연단에 오른 한 의원은 난데없이 축구 스코어를 말했고,다른 의원은 다이어트 비법을 털어놨다. 연설하는 동안 장관들은 회의장 테이블 밑에서 새우잠을 잤다. 필리버스터는 해적 또는 약탈자를 뜻하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한 제도다. 미국을 비롯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시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선 1969년 8월29일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개헌을 막으려고 10시간5분 동안 발언한 것이 기록이다. 당시 속기사 60여명이 동원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4년 동료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5시간19분간 연속 발언했다. 나중엔 책을 읽어내려가며 시간을 때웠다.
1973년 폐지된 필리버스터제가 우리 국회에 다시 도입될 모양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그제 합의한 국회선진화 방안에 직권상정 요건 강화,국회의장석 점거 처벌 등과 함께 필리버스터제가 포함됐다. 9월 정기국회에서 처리되면 내년 6월 19대 국회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난장판 국회를 막아보자는 취지다. 다수결 원칙의 무력화 등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몸싸움과 공중부양,해머까지 등장해 국제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고육책일 게다. 그래도 걱정은 남는다. 국익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효과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
작년 말엔 버니 샌더슨 미 상원의원이 8시간37분간 연설했다. 오전 10시30분 "감세 연장에 대해 몇 마디 하고 싶다"며 말문을 열었지만 '몇 마디'는 해가 뉘엿뉘엿 져서야 끝났다. 의원들은 하나둘 의사당을 빠져나갔고 보좌관과 서기,일부 방문객만 남았다. 연설을 마친 샌더스 의원은 "지쳤다"며 의사당을 떠났다. 2009년 이스라엘 야당의원들은 새 예산법을 놓고 21시간 동안 릴레이 연설을 강행했다. 연단에 오른 한 의원은 난데없이 축구 스코어를 말했고,다른 의원은 다이어트 비법을 털어놨다. 연설하는 동안 장관들은 회의장 테이블 밑에서 새우잠을 잤다. 필리버스터는 해적 또는 약탈자를 뜻하는 네덜란드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한 제도다. 미국을 비롯 영국 프랑스 캐나다 등에서 시행 중이다. 우리나라에선 1969년 8월29일 박한상 신민당 의원이 3선개헌을 막으려고 10시간5분 동안 발언한 것이 기록이다. 당시 속기사 60여명이 동원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64년 동료 김준연 의원 구속동의안 표결을 저지하기 위해 5시간19분간 연속 발언했다. 나중엔 책을 읽어내려가며 시간을 때웠다.
1973년 폐지된 필리버스터제가 우리 국회에 다시 도입될 모양이다.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그제 합의한 국회선진화 방안에 직권상정 요건 강화,국회의장석 점거 처벌 등과 함께 필리버스터제가 포함됐다. 9월 정기국회에서 처리되면 내년 6월 19대 국회부터 적용된다고 한다.
말할 것도 없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난장판 국회를 막아보자는 취지다. 다수결 원칙의 무력화 등 부작용이 우려되지만 몸싸움과 공중부양,해머까지 등장해 국제 망신을 당하는 것보다는 낫겠다는 고육책일 게다. 그래도 걱정은 남는다. 국익보다 당리당략을 앞세우는 행태가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효과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정환 논설위원 jhle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