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 교수의 경제학 멘토링] 불편한 'QWERTY 자판' 왜 계속 쓸까

전기소켓과 전기기구는 생산자가 서로 다르지만 두 장치의 구조는 어김없이 서로 딱 들어맞는다. 같은 표준에 맞추어서 생산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업자가 지키는 표준을 바꾸려면 기존의 모든 관련 제품을 폐기하거나 별도의 보조기구를 장착해야 한다. 이처럼 변경 비용이 엄청나므로 표준은 한 번 정착되면 바꾸기 어렵다.

PC의 영문자판 QWERTY는 빈번히 사용되는 철자 A를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쳐야 하므로 인체공학적으로는 결코 좋은 배열이 아니다. 그러나 QWERTY가 자판의 표준으로 정립된 뒤 모든 사람들은 그 자판을 익혀 왔다. 이들은 아무리 더 우수한 자판이 새로 나오더라도 자신이 이미 익숙해진 QWERTY 자판을 사용할 뿐 새 자판은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비디오 기기로는 Beta 방식의 기기가 VHS보다 시장에 먼저 진출했다. 그러나 소비자들은 녹화를 더 오래 할 수 있는 VHS 방식을 좋아한다. 이에 따라 많은 녹화물이 VHS 방식으로 제작됐다. Beta 방식은 뒤늦게 녹화시간을 늘렸지만 소비자들은 재생 가능한 녹화물이 이미 많아진 VHS 기기를 계속 더 많이 구입했다. 그 결과 표준을 선점하지 못한 Beta기기는 기술적으로는 더 우수하면서도 가정 비디오 시장에서 철저히 패배하고 말았다.

QWERTY 방식이나 VHS 방식은 그것이 표준으로 정착되기 이전에 더 우수한 경쟁상대와 맞닥뜨렸다면 결코 견디지 못하고 패퇴했을 것이다.

그러나 QWERTY 자판을 익힌 사람들이 많아지고 VHS 방식의 녹화물이 많이 제작된 다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더 우수한 새 방식을 거부하고 기존의 익숙하고 편리해진 방식에 집착하게 됐다. 그 결과 후세대들은 스스로 불편한 표준에 적응해야 한다. 이처럼 시장 표준 중에는 최상의 것이 아니면서도 우연한 계기에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였기 때문에 표준으로 고착(lock-in) 된 것이 적지 않다.

돌이켜 보면 과거의 선택이 최선은 아니었지만 그 이후의 경로가 이 선택을 스스로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전개됐기 때문에 버릴 수 없게 됐다. 현존하는 표준이나 제도 및 관행은 대부분 이처럼 '경로의존적(path dependent)' 방식으로 그 지위를 굳혔다.

내 나라에 유리한 표준이 일단 글로벌 표준으로 채택되면 표준의 경로의존성은 스스로 그 지위를 강화해 줄 것이다. 각국은 이러한 경로의존성을 믿기 때문에 자국의 표준이 열등하더라도 결코 표준의 경쟁에서 양보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글로벌 표준을 잘못 책정하면 인류는 두고두고 그 대가를 치를 것이다.

이승훈 < 서울대 명예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