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로 가는 窓] "내일 계약서 보낼게"…감감 무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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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와 사업할 땐 '느긋'하게사무실로 찾아와 만나기로 한 바이어가 약속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일이 많다 보니 이제 그러려니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결국 약속 시간보다 40분이 지나서 A씨가 도착했다. 인사를 나누고 이야기를 시작하려는데 A씨의 휴대폰 벨이 울린다. 아마 다른 사람과 약속이 있는데 나타나지 않아 그쪽에서 언제 도착하느냐고 묻는 것 같다. A씨는 '금방(al ratito)' 그곳에 도착할 것이라고 한다. 이제 나와 대화를 시작해야 하는데 바로 그곳에 도착 한다니?
위의 예는 멕시코에서는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al ratito'는 사전적으로는 우리말로 '곧,조금 있다' 등으로 해석할 수 있지만 멕시코에서라면 '언젠가는 할 수도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게 자연스럽다. 스페인어를 배운 사람이라면 멕시코인들이 시간과 관련된 단어를 말할 때 많은 혼란에 직면한다. 한국에서 시장개척단이 방문할 때면 이런 멕시코 사람들의 시간 개념을 잘 아는 KOTRA 직원들은 항상 긴장할 수밖에 없다. 시간대별로 짜놓은 상담스케줄에서 한 명이 늦으면 다른 상담까지 영향을 받기 때문에 몇 번의 전화통화와 문서로 멕시코 바이어에게 상담시간을 다짐받는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바이어들이 약속시간에 호텔 상담장에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다. 심지어는 어디쯤 오고 있느냐고 전화를 하면 호텔 앞에 와 있다면서 '지금 즉시(ahorita)' 상담장으로 올라갈 것이라고 하고 영영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멕시코 바이어와 거래시 '내일까지(manana)' 계약서를 보내거나 회신을 주겠다고 하고는 감감 무소식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멕시코인들은 자신만의 시간 관념을 갖고 있다. 예전에 우리도 '코리아 타임'이란 말이 있었지만,이미 서구식 시간 개념에 익숙해진 우리 기업인들이 멕시코식 시간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단어의 의미를 사전적 의미로만 받아들이는 경우 낭패를 보기 쉽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 · 현재에 충실하라)'을 중시하는 멕시코인들에게 지금과 오늘이 중요한 것이지,내일은 다음 일이다. 그래서 'manana' 는 내일이 아니라 "지금은 안 되고 다음에 해보자"는 뜻이 많이 내포돼 있다. 내일이 될 수도 있고,경우에 따라서는 한 달 뒤일 수도 있는 것이다.
'ahorita'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사전적 의미는 '지금 즉시'이지만 사안에 따라 'manana'보다도 더 오랜 시간이 소요될 수도 있다. 상점에서 물건을 고르던 손님이 살 만한 게 없어 나가면서도 으레 'ahorita vengo(금방 올게)'라고 하고 상점 주인도 아예 손님이 다시 오리라 기대도 하지 않는 곳이 멕시코다.
정(情)이 많은 멕시코인들은 무슨 약속이건 부탁이건 상대방에게 노골적으로 'no'라고 말하지 못하고 일단 받아들이고 보는 경우가 많다. 약속을 못 지켜서 미안한 것보다는,면전에서 거절하는 것을 더 안쓰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길을 물어보면 본인도 모르면서 열심히 아는 것처럼 잘못 알려줘 오히려 길을 헤매게 하는 경우와 비슷하다. 잘못된 정보 때문에 물어본 사람이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 물어봤을 때 모른다고 하면 얼마나 실망할까 하는 것을 더욱 안타깝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웬만한 아파트에는 주인용 출입문 및 엘리베이터와 하녀용이 구분돼 있을 정도로 사회 계층 간 구별이 엄격한 멕시코에서는 상류층으로 갈수록 권위의식이 더 강하고 시간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사업상 시간 약속을 할 때는 이런 멕시코인들의 시간 개념을 충분히 감안해 확실하게 다짐을 하거나 예상보다 여유 있는 준비 시간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중요한 거래관계에 관한 것이라면 정확하게 언제까지 어떤 것이 돼야 한다는 시한을 정해둘 필요가 있다.
세계 14위의 경제 규모와 연간 3000억달러가 넘는 중남미 최대 수입 시장을 보유한 매력적인 멕시코 시장을 우리와 사고방식이 다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규남 KOTRA 중미지역 총괄센터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