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인터뷰] 이상림 회장 "건축물 수준 높아져야 國格도 향상…건축가를 믿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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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축가 이상림 공간그룹 회장
건축은 건축주·사회·땅의 '조화'…유용성·견고성·아름다움 갖춰야
남극 장보고기지 애착 많아…영국 유력 설계업체 눌렀죠
회사 외형 대신 작품 가치로 승부…건축가는 고되고 힘든 3D 직업
한눈에 보기에도 '건축가가 일하는 곳'이지 싶다. 건물 외벽은 진녹색 담쟁이로 칭칭 감겨 있다. 내부는 계단을 따라 반 층씩 사무실이 있는 구조다. 건물과 건물 사이 마당에는 돌탑과 'ㄷ'자형 한옥을 들였다. 창덕궁과 현대건설 사이에 있는 종합건축설계사무소 공간그룹 사옥이다. 건축가 이상림 공간그룹 회장(56)은 공간 대표들의 혼이 담긴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사옥은 서관과 동관,둘을 잇는 브리지로 돼 있습니다. 서관은 공간건축 1대 대표였던 고(故) 김수근 선생께서,동관은 2대 장세양 대표께서 사무실을 넓히려고 지었어요. 장 대표는 동관을 통유리 건물로 설계했습니다. 서관 3층 스승 설계실에서 항상 창덕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죠.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겠다는 장 대표의 의지였던 셈입니다. 3대 대표인 제가 서관과 동관을 잇는 브리지와 한옥을 들여놓았고요. "외국인들에게 공간그룹 사옥이 이색적으로 비쳐지는 모양이라고 했다. "지금도 창덕궁을 야간 관람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사옥을 자주 찾습니다. 빈 방 있느냐고요. 정중하게 돌려보내죠(웃음)."
이 회장은 자신을 '반쪽짜리 건축가'로 표현했다. 한국의 건축을 제대로 모른 채 서양 건축을 해 왔다는 겸양에서다. "서울시가 비원 · 돈화문 주유소 자리에 전시장과 국악공연장을 각각 짓기로 하고 응모작을 공모 중입니다. 한옥으로 1층만 짓고 나머지 시설은 지하 2,3층에 넣는 형태인데 준비를 하면서 (한옥을)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자괴감이 들더군요. 다음달 초 작품을 제출한 뒤에도 한옥 공부는 계속할 작정입니다. "
그는 건축을 '건축주와 사회와 땅이 원하는 바를 실현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건축가의 의지는 마지막 고려 사항이다. 상충하는 점을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은 건축가의 몫이다. "지금까지 소극적인 조화를 모색했다면,이제는 주도적으로 이끄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건물 외관이나 방향,설비 등 모든 면에서 그렇죠.건축가들이 먼저 변하고,그런 마음이 건축주나 현장 관련자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그는 조화를 이끌어낸다는 측면에서 선조들은 매우 과학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건축은 영어의 '아키텍처(architecture)'를 한자로 바꾼 단어죠.일제 강점기에 들어왔고요. 우리는 이전부터 영조(營造)라는 좋은 말을 갖고 있었습니다. 땅을 잘 다듬고 집을 편안하게 앉힌다는 의미입니다. 건축보다는 영조가 훨씬 직접적이고 충실한 단어라고 봅니다. "
그가 생각하는 바람직한 건축가는 건축주,사회,땅이 원하는 바에 자신의 의도를 변화시켜 담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다고 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가 얘기한 유용성(우틸리타스 · utilitas),아름다움(베누스타스 · venustas),견고성(피르미타스 · firmitas)입니다. 건물은 안전하면서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하며,보기에도 좋아야 합니다. "
용산국제업무지구 랜드마크 설계자로 해외 건축가가 거론되는 데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해외 스타 건축가들의 역량은 인정합니다. 거론되는 건축가 중 한 명인 이탈리아의 렌조 피아노는 첨단 기술에 강하면서도 따뜻한 감성을 작품에 표현해내는 훌륭한 건축가죠.그렇지만 한국 건축가들을 믿고 맡겨준다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이 회장은 한국 건축계가 건강해지는 전제 조건으로 건축가에 대한 신뢰를 들었다. "한국에서 대규모 예술 공연장을 완성했다고 칩시다. 대통령,관련 부처 장관,관련 단체장,시공사 사장 등이 모두 참석하지만 공연장이 태어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건축가는 제외됩니다. 독일 국회의사당을 설계한 영국의 건축가 노만 포스터는 준공식에서 독일 대통령에게 키를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건축가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면 건축물의 수준과 문화,사회,나아가 국가 전체의 격이 높아집니다. 건축가를 일꾼의 개념으로 보는 건축주는 건물을 망치는 것입니다. "
그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부산아시아드경기장을 꼽는다.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여년에 걸쳐 만든 작품이어서 애착이 갑니다. 지구에 착륙한 우주선을 형상화하기 위해 경기장 상공을 막으로 지었는데,야간에 은빛 모습이 아름답죠.개인적으론 디자인 파트너로 있다가 1996년 장세양 대표가 작고하면서 대표를 맡아 처음 마무리한 작품이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고요. "
지난해 국토해양부 실시설계에서 당선된 장보고기지도 높은 점수를 주는 작품이다. 해외 유력 설계업체를 이겼다는 점에서다. "초속 60m의 남극 강풍에 잘 견디도록 기지 지붕에 골프공의 딤플 설계를 채택했습니다. 3개의 날개를 가진 모양인데 날개 끝에는 시설 수요가 늘어나면 증축이 가능하도록 했어요. 영국의 남극기지 할리식스를 설계한 영국 설계업체 휴브로튼사와 경쟁했는데 열차 형태 구조물을 연결한 할리식스 구조를 그대로 제출해 간단하게 이겼습니다. "최고경영자(CEO)로서 그의 경영 능력이 궁금해졌다. "취임 당시 100억원가량이던 매출을 지난해 직원 470여명과 함께 550억원 정도로 늘렸습니다. 제가 잘 해서라기보다는 대한민국 경제 규모가 커진 덕이죠(웃음).국내 종합건축설계사무소 가운데는 6위입니다. "
그는 "CEO를 맡은 이후 어려움의 연속이었다"면서도 2006년의 결정이 가장 힘들었다고 회고했다. "매출이 1000억원을 넘어가면서 직원을 530명에서 1000명으로 늘려야만 하는 시기였죠.설계사무소는 외형 못지 않게 얼마나 가치있는 작품을 만드느냐가 중요합니다. 고민 끝에 외형을 조금 줄이고 작품의 가치로 승부하기로 결론냈습니다. 당시 내부에서 여러 말이 나돌기도 했지만,지금 되돌아보면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습니다. "
해외 사업은 그가 경영 역량을 집중하는 분야 가운데 하나다. 1970년대 1대 김수근 대표가 시작한 사업이기도 하지만 해외에서 실적을 쌓아야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한다는 생각에서다.
어떻게 건축가가 됐을까. 이 회장이 들려준 과정은 의외였다. "국립중앙의료원 교수를 지낸 선친(고 이영주 박사)의 영향을 받아 초등학교 때 병원놀이를 자주 했습니다. 친구에게 약을 잘못 먹여 병원 신세를 지게도 했고요. 당연히 의사가 되는 걸로 생각하고 의대를 가려고 했는데,1차 떨어지고 2차에 의대 있는 곳을 알아봤더니 한양대와 경희대더군요. 1지망으로 한양대 의대를,2지망으로 건축학과를 썼는데 1지망은 떨어지고 2지망은 붙었습니다. 지금은 만족하고 행복하죠.의사로 성공한 친구들이 있는데,건축가가 갖고 있는 특성 때문인지 다들 재미있겠다고 부러워합니다. 큰 아이(이충헌 · 32)도 건축 전공(미국 워싱턴대)으로 대학원(서울대)까지 마쳤으니 곧 건축을 할 것입니다. "그는 건축가가 재미있는 직업만은 아니라는 말로 인터뷰를 마쳤다. "멋 부리고 와인 잘 마시는 직업군은 아니죠.3D 업종 종사자입니다. 얼마나 고된 직업인지 모릅니다. 인류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만난사람 = 박기호 건설부동산부장 khpar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