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 세계화, 장인 정신과 사명감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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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훈의 기업인 탐구2000년대 중반 어느날.고속도로 1차로를 질주하던 배혜정 배혜정도가 대표의 차가 갑자기 섰다. 뒤차들이 굉음을 울리며 급히 차로를 바꿔 질주했다. 아찔했다. '차가 고장이 난 걸까. '확인해보니 기름이 떨어진 게 아닌가. 막걸리 사업을 시작한 뒤 몇 년 지난 때였다. 그동안 돈을 많이 까먹었지만 여전히 채권자들의 독촉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럴 때 직원들 월급날은 왜 이리 빨리 돌아오는지.
배혜정 배혜정도가 대표
아버지인 배상면 국순당 창업자(87)의 도움으로 화성에 공장을 짓기는 했지만 제품이 잘 팔리지 않아 기계는 서있는 날이 더 많았다. 자금 마련에 이리저리 뛰다 보니 차에 기름 넣는 것도 까먹었던 것이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던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겨우 위기를 모면하자 이제는 온몸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팔이 마비되기 시작하더니 목까지 뻣뻣해졌다. 다리마저 불편해지는가 싶더니 절룩거릴 정도가 됐다. 침의 도움으로 간신히 마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주위에선 "그것 봐.네가 뭘 안다고 술장사야.당장 때려치워.막걸리는 무슨 놈의 막걸리야"라는 질타가 끊이질 않았다. 이런 소리가 수년째 지속됐다.
며칠 밤잠을 못 자며 고심하던 배 대표는 눈물을 머금고 마침내 자식 같은 회사를 팔기로 결심했다. 한 회사 관계자가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등을 대동하고 나타났다. 이때 배 대표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내가 개발한 '부자'라는 술을 사장시키지 말 것과 고용을 승계해줄 것이었다. 이들은 "지식재산권이나 브랜드가치는 일절 인정해줄 수 없고 땅값만 쳐주겠다"며 "팔고 싶으면 팔고 싫으면 관두라"고 잘라말했다. 그것도 단 하루의 시간만 줬다.
사무실로 돌아온 배 대표는 목숨처럼 아끼던 막걸리를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참고 참아가며 막걸리 세계화를 부르짖던 그가 이제는 처량한 신세에 처한 것이다. 그러던 중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그동안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는가. 내 아들들은 엄마를 뭐라고 생각할까. 자식들에게 너희도 일하다가 힘들면 엄마처럼 때려치우라고 말해야 하나. "
그는 고개를 저었다. 다시 한번 시작해보자며 이를 악물었다. 기업을 팔지 않겠다고 통보했다.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지금,배 대표의 표정은 아주 밝아졌다. '부자'를 비롯해 몇몇 제품의 지명도가 높아지며 이를 아끼는 고객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중국 대만 등지로 수출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배 대표는 "연간 수출액은 약 100만달러에 이른다"고 했다. 아직 만족할 만한 성과는 아니지만 꿈이 점차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경기도지사로부터 'G마크'를 받았고 전통식품 품질인증마크인 '물레방아마크'도 획득했다.
성심여대(지금의 가톨릭대) 사회사업학과를 나온 배 대표가 막걸리 사업에 나선 것은 2000년.아버지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남편을 따라 일본에서 5년간 생활한 뒤 남편이 다시 파키스탄으로 발령받자 아버지는 배 대표를 불렀다. "마흔이 넘었으니 너도 이제는 외국으로만 다닐 게 아니라 네 사업을 해볼 생각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아이템으로 한국의 전통주인 막걸리를 추천했다. 막걸리는 배 창업자가 평생 마음에 두고 있던 제품이었다. 나라마다 대표적인 술이 있다. 프랑스 코냑,러시아 보드카,독일 맥주,중국 고량주,멕시코 데킬라 등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술은 막걸리다. 가장 오래된 술이자 사랑받아온 술이다. 옛날에는 술지게미로 간식을 대신하기도 했다. 농사짓는 사람에게 막걸리는 술이자 음식이며 피로회복제이기도 했다.
배 대표는 아버지 영향으로 양조장에서 놀면서 자랐다. 그 역시 언젠가 이 분야에 뛰어든다면 전통주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렇다면 막걸리에 도전해보자고 생각했다. 직원 1명과 2000년 전통주연구소를 만들었다. 이게 시작이다. 이듬해인 2001년 배혜정누룩도가라는 상호로 바꿨고 작년 말에는 ㈜배혜정도가로 바꿨다.
오로지 막걸리만을 만들고 이를 세계화하는 데 노력하겠다고 목표를 삼았다. 그러나 그의 사업역정은 막걸리에 취한 사람처럼 자리를 잡지 못하고 오랫동안 비틀거렸다. 2001년에는 '부자'를 출시했다. 국내 최초의 유리병 고급 막걸리였다. 2002년에는 일본에 첫 수출했고 그해 대만,2003년에는 미국에 선적했다. 하지만 양은 적었다. 어려움이 지속됐다. 무엇보다 개발비가 많이 들었다. 술산업은 규제가 많고 아주 까다로운 분야다. 이걸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이다.
있는 재산을 많이 까먹었다. 그러나 신제품 개발 열정은 사그러들지 않았다. 2005년에는 쌀포도막걸리인 '새색시',2006년 '아리랑',2007년에는 '우곡소주'를 잇따라 개발했다. 이어 '부자쌀막걸리''자색고구마 막걸리'를 내놨다. 배 대표는 "자색고구마 막걸리는 2009년 한 · 일 정상회담에서 건배주로 채택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최근에는 칵테일을 즐기는 젊은층을 겨냥해 다양한 막걸리 칵테일을 내놨다. 바나나 포도 복분자 딸기 매실 등의 과즙이 담긴 막걸리칵테일이다. 브랜드는 '탁테일'이다. 탁주와 칵테일을 결합시킨 말이다. 탁주가 바로 막걸리다.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을 통해서 판매하며 최근에는 외국인이 많이 찾는 공항면세점에도 입점했다.
이 회사의 막걸리 제조 과정은 경쟁사와는 조금 다르다. 좋은 쌀을 골라 잘 씻은 뒤 '찌는' 타사와는 달리 '생쌀'을 잘게 으깬다. "찌지 않고 생쌀을 쓰면 아미노산과 식이섬유 등 영양소가 풍부한 장점이 있다"고 배 대표는 설명했다. 이를 탱크에 넣은 뒤 누룩과 효모,깨끗한 물을 부어 발효시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철저한 발효 관리다. 일정한 온도 유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맛이 일정하게 유지된다. 발효탱크를 열어 보니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오며 술익는 냄새가 물씬 풍겨나온다. 발효가 끝나면 입자를 균질하게 만든다. 체로 거르는 작업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어 생막걸리는 그냥 병에 담고 살균막걸리는 저온 살균 과정을 거친다. 쌀을 막걸리로 빚어내는 데 대체로 7~10일 정도 걸린다.
배 대표는 "막걸리 열풍이 2~3년 전부터 시작됐지만 2000년에 이 사업을 시작할 때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며 "'도대체 싸구려 서민술로 어떻게 세계화를 하느냐'는 따가운 시선이 많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제는 일본에서조차 여러 업체가 막걸리 생산에 도전하고 있고 이를 세계화할 움직임을 보일 정도"라고 덧붙였다. 그는 "김치는 우리 고유의 식품이지만 일본이 '기무치'라는 이름으로 표준화해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지 않느냐"며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배 대표는 "세계화에 성공하려면 위생적이고 과학적인 품질관리가 중요하다"며 "이를 통해 균일한 품질과 맛을 내야 하는데 막걸리는 누룩과 효모라는 생물학적 방법을 쓰기 때문에 발효가 지나쳐도 안 되고 모자라도 안 되는 아주 까다로운 분야"라고 설명했다. 따라서 "장인정신과 사명감이 없으면 세계화를 할 수 없다"고 잘라말한다. 그는 "막걸리로 돈 벌고 싶은 생각은 없다"며 "어차피 막걸리 세계화를 누군가는 해야 한다면 힘들더라도 기꺼이 나설 것"이라고 각오를 밝혔다.
김낙훈 중기전문기자 nhk@hankyung.com
"盧 돈아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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