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버냉키가 진정 바라는 것

시장·학계 퍼즐 맞추기 한창…물가 상승 속 선택 어려워
2002년 11월21일 워싱턴에 위치한 전미경제학자클럽(NEC).벤 버냉키 당시 미국 중앙은행(Fed) 이사는 자신감이 넘쳤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는 게 연설 주제였다. 그가 상정한 최악의 시나리오는 물가가 하락하면서 경기가 침체하는 디플레이션.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은 디플레가 주된 요인이었다고 전례를 들었다.

이날 이코노미스트들은 디플레가 엄습했을 경우 Fed가 취할 수 있는 치유책에 이목을 집중시켰다. 버냉키는 기준금리가 제로(0) 수준일 때도 Fed의 실탄은 바닥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기준금리를 특정 기간 동안 묶어둔다고 약속하면 장기금리 인하를 유도할 수 있다고 했다. 장기금리는 현재의 단기금리와 미래의 단기금리 기대치를 평균하는 값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코노미스트들은 숨을 죽였다. 버냉키는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해법"이라며 "Fed가 장기 국채 수익률에 상한선을 설정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향후 2년 내 만기가 도래하는 장기 국채를 예로 들었다. 만기 시점부터 2년간 목표로 한 수익률과 같은 가격으로 이 국채를 시장에서 무제한으로 매입할 것을 시장과 약속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마저 실패한다면 기업들이 발행하는 회사채의 수익률과 기업어음에도 Fed가 '보이는 손'을 작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Fed의 재할인 창구를 통해 시중은행들에 제로금리로 일정 기간 대출을 해주고,대신 회사채나 기업어음을 담보로 잡으면 대출기간과 만기가 같은 회사채와 기업어음의 이자율을 낮출 수 있다고 했다. 투자자금이 부족한 기업들에 간접적으로 달러를 풀겠다는 것이다.

"(통화주의자) 밀턴 프리드먼은 헬리콥터에서 달러를 뿌리겠다고 말했다"는 버냉키의 언급에선 미래 Fed 의장의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2006년 Fed 의장에 오른 그는 2008년 이후 월가발 금융위기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1,2차 양적완화 정책을 과감하게 채택했다. 이제 글로벌 금융시장은 오는 26일 미국 와이오밍주 잭슨홀에서 열리는 세계 중앙은행 총재회의를 주시한다. 시장과 학계에선 버냉키 의장이 여기서 어떤 경제위기 타개책을 내놓을지를 놓고 갖가지 퍼즐 맞추기가 한창이다. 2002년 11월,금융위기 직후와 요즘의 상황은 다르다. 지금은 물가가 오르는데 경기는 악화하는 스태그플레이션 상황이다. 한 쪽 방향으로 쏠린 정책을 구사하기가 쉽지 않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물가상승 우려 때문에 추가 양적완화를 주저한다면 Fed의 물가관리 목표를 현행 2%에서 4~6%로 상향 조정하면 된다고 권고한다. 반면 공화당 대통령 선거 후보인 릭 페리 텍사스 주지사는 3차 양적완화로 달러를 더 푸는 정책은 '반역'이라고 경고했다. 버냉키 의장의 머릿속은 아무도 열어볼 수 없다. 그는 항상 통화정책의 비용과 혜택을 저울질한다고 밝혀왔다. 버냉키식 창의와 용기를 다시 한번 학수고대하는 까닭이다. 2002년 NEC 연설에서 곁들인 그의 한 마디는 여운이 깊다.

"1980년대,1990년대 대부분의 선진국 중앙은행은 인플레이션이라는 용(dragon)을 우리에 가둘 수 있었다. 물가 불안의 고비용을 정치 지도자들이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일본의 디플레가 장기화한 것은 통화정책 수단이 부족했다기보다 이를 둘러싼 지리한 정치적 논쟁이 원인이었다. "

김홍열 워싱턴 특파원 com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