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고에 190조엔 쌓아둔 일본…돈이 안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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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고용 불안감 커지며 개인자산 60% 투자 대신 '보관'
은행도 기업대출 보다 안전한 국채 투자 선호…경제침체 악순환 부추겨
일본 개인들의 돈이 은행 보통예금으로 몰리고 있다. 경기와 고용에 대한 불안이 커지면서 수익성보다는 안정성을 따지는 투자 경향이 확산됐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터진 대지진 이후 이런 추세는 더욱 강화되고 있다. 은행은 돈을 떼일 위험이 있는 기업 대출보다는 안전한 국채 투자에만 열심이다. 일본의 국부(國富)가 경제를 일으키는 윤활유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저축→은행→국채'의 한정된 순환고리 안에서 길을 잃은 모습이다.
◆개인 보통예금 사상 최대치중앙은행인 일본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개인 보통예금 잔액은 사상 최대치인 190조9000억엔(2800조원)으로 불어났다. 작년 같은 기간에 비해서는 6.0%(10조7000억엔) 증가했다. 연평균 3% 정도이던 보통예금 증가율이 최근 들어 두 배 이상 높아졌다. 대지진이 발생한 3월 이후 6조엔 이상이 보통예금으로 들어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7월에도 보통예금 잔액 증가율이 5%를 넘어선 것으로 추정된다"고 보도했다.
일본인들이 보통예금을 선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환금성 때문이다. 재난이 터지거나 직장을 잃었을 때 곧바로 생활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는 곳에 일단 돈을 묻어두겠다는 심리다. 경기침체가 지속되면서 마땅히 투자할 곳이 없다는 것도 원인이다.
◆60%의 덫…일본판 '돈맥경화'
일본 개인의 보유자산 규모는 세계 최대 수준이다. 현금과 예금에다 보험 연금 채권 주식 등을 모두 합친 일본의 개인 금융자산 규모는 지난 3월 말 기준으로 1467조엔(2경원)에 달한다. 독일보다는 두 배,프랑스보다는 세 배 정도 많은 수준이다. 보스턴컨설팅그룹에 따르면 전 세계 개인 금융자산의 총합은 약 9800조엔.이 중 일본 국민의 자산이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 자금이 보통예금과 같은 안전자산 안에서만 뱅뱅 돌고 있다는 것이다. 니혼게이자이는 이런 현상을 '두 개의 60% 덫에 걸렸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첫 번째 '60%'는 전체 금융자산의 60%가 60세 이상의 노인 가구에 집중돼 있다는 것.리스크를 피하고 싶은 보수적인 투자자의 손에 대부분의 돈이 쥐어져 있는 셈이다.
두 번째 '60%'는 일본 개인 금융자산 가운데 현금과 예금의 비중이 60%에 육박한다는 것.주식과 투자신탁 등의 비중은 10% 미만이다. 일본 금융회사 역시 극히 보수적이다. 보통예금 등으로 받은 개인의 돈을 대부분 국채 등 안전자산을 사들이는 데 쓰고 있다. 일본 국채의 95%가 일본 내에서 소화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현재로서는 정부의 부채가 개인의 자산으로 지탱되고 있는 형국이지만 언제까지 이게 가능할지는 불투명하다"고 우려했다. 고령화가 심화되는 가운데 일본 경제의 활력이 계속 떨어지면 개인의 금융자산도 줄어들게 되고 이로 인해 일본 정부의 부채 문제도 다시 조명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도쿄=안재석 특파원 yag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