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25.7%…위대한 시민들이 있었다
입력
수정
공짜를 거부한 당신들이 한국의 품격 지켰다전면 무상급식을 막으려는 서울시의 주민투표가 실패했다. 투표율이 33.3%에 미달해 투표함을 열지도 못했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나홀로 투쟁이었다. 그러나 투표율 25.7%가 갖는 의미는 절대 가볍지 않다. 복지 포퓰리즘은 안된다는 위대한 시민정신의 발현이기도 했다. 투표는 평일에 치러졌고 민주당이 거부운동까지 벌이면서 사실상 공개투표가 돼버렸다. 아침 출근길과 저녁 퇴근길에 짬을 내고 한낮에는 땡볕을 감수하면서 자발적으로 투표장을 찾은 시민이 무려 25.7%였다. 많은 동네에서 투표장소가 바뀌기도 했다. 일일이 직접 찾아가 투표한 사람이 이렇게나 많았다.
청와대와 한나라당이 포퓰리즘 정책을 무더기로 쏟아내는 와중이었다. 대선 잠룡들조차 침묵했다. 이런 와중에 굳이 제발로 걸어서 투표소를 찾은 시민들이었다. 참으로 위대한 발걸음들이었다. 이번 투표의 진정한 승리자는 이들 25.7%다. 정치인 그 누구도 승리하지 못했다. 만면에 승리의 웃음을 보여주는 민주당 지도부도 내심으로는 모골이 송연할 것이다. 한나라당의 잠룡들이나 한창 포퓰리즘 정책에 열올리던 지도부 역시 그랬을 것이다. 대통령이 공생발전을 부르짖고 사회 일각에서는 자본주의 4.0 운운하면서 복지경쟁을 벌이던 와중에 치러진 투표였다. 그런 속에서 자신을 분명히 드러내고 "그것은 아니야!"라고 외친 칼레의 시민들이었다. 투표율이 저조했다지만 그렇게 볼 일만도 아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 곽노현 서울시교육감이 전체 유권자의 17.3% 지지를 받아 당선됐던 점에 비하면 시민들의 참여도가 결코 낮지 않았다. 선택적 무상급식이 아닌 전면 무상급식 방안만을 주민투표에 부쳤더라면 더욱 낮았을 것이다. 이는 현행 주민투표제도가 안고 있는 고질적 문제를 지적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주민투표 요건을 단순 다수가 아닌 3분의 1 이상으로 엄격하게 제한한 것은 남발을 막기 위한 것일 뿐이다. 어떤 투표건 민의를 정확하게 반영할 수 없다는 케네스 애로의 불가능성 정리가 있다고 하지만 이미 25.7% 의 투표율만으로도 정치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사탕발림 공약들을 거부하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존재는 충분히 드러났다.
오 시장은 큰 정치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오 시장 개인으로서는 지난해 지방선거 때의 지지자보다 7만명 이상 많은 결과를 얻었으니 결코 실패한 게 아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곧바로 사퇴하는 것이 옳다.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언제 치르느냐는 따위의 작은 정략적 고려는 패배주의다. 지금 한나라당이 신뢰의 위기, 정체성의 상실에 빠진 것은 바로 이런 정략주의에 함몰됐기 때문이다. 작은 정략에서 벗어나야 큰 지도자가 될 수 있다. 이번 투표는 포퓰리즘에 빠진 정치권 전체를 향해 던진 준엄한 질책이었다.
돌아보면 이번 투표는 실로 기이한 구도였다. 투표구를 굳이 구획해 참여율을 본다면 소위 중산층 지역이 높았고 저소득 지역은 낮았다. 잘사는 사람은 공짜 밥을 안 먹겠다는 것이었고 상대적으로 서민 지역에서는 부자들도 공짜 밥 먹으라고 권하는 웃기는 결과였다. 정치권의 넘치는 무상 시리즈가 갖는 모순을 잘 보여주는 그런 투표였다. 어떻든 이들 문제는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더 치열한 논란을 부를 게 틀림없다. 민주당은 보편적 완전 공짜 복지로 달려가길 바란다. 그렇게 해서 밑천을 모두 보여주는 게 좋을 것이다. 한나라당은 정체성을 회복하기 바란다. 이번 투표에서도 배운 것이 없다면 그런 정당은 해체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겐 25.7%의 위대한 시민이 있음이 확인됐다. 대한민국은 희망을 봤다.
희생자라며…
실패하는게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