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포도밭엔 詩가 주렁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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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시인들과 '포도밭 예술제'…'과수원에서 젊음이 일어'도 출간'장현리 유기봉군 포도는/하얀 봉지에 검은 곰팡이가 가득하다/날파리들이 날아오르고/비가 오면 하나,둘,알 들/옆구리가 터진다. /포도는 서로 둥그러지면서 맛이/드는 법인데/유기농을 찾으시면서/유기봉 포도를 저리 치워 버리고/모양 좋고 빛깔 예쁘고 큰 것만 고르시는 김 여사님!/아시죠/아시죠/좋은 것에는 항상 번외 된 과일이 있습니다. /못난이 유기봉 포도같이,'('유기봉군 포도같이')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장현리의 한 포도밭.'농부 시인' 류기봉 씨(사진)가 농약을 버리고 지렁이와 땅강아지를 벗삼아 일군 곳이다. 이곳에선 해마다 시가 있는 작은 예술제가 열린다. 햇포도를 수확하는 첫 주말에 시인들이 모여 '포도밭 시회(詩會)'를 열며 광목천에 육필로 쓴 시를 포도나무에 드리우고 포도밭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 류 시인의 스승인 고 김춘수 시인의 제안으로 시작해 벌써 열네 돌째다. 포도밭 시회 외에 포도주 시음,시낭송,음악회 등이 펼쳐지는 올해 '포도밭 축제'는 3일 열린다. 《과수원에서 젊음이 일어》(푸른솔 펴냄)는 포도밭 축제에 참여해온 시인들이 뜻을 모아 펴낸 생태시 선집이다. 류 시인 외에 정현종 이수익 조정권 정호승 이문재 이승하 박주택 박상순 고두현 김정산 문태준 이덕규 김행숙 차주일 심언주 이경우 김원경 씨 등 17명의 시인과 김종대 헌법재판소 재판관,이성미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가 한 편씩 시를 보탰다. 책에 실린 30여편의 시들은 오늘날 물질문명의 더께 속에서 잃어버린 생명성과 인간성을 일깨운다.
'시골에 있는 친구가/공기를 보내왔다. /공기를 뜯어보니 사과향기가 난다. 아,이 공기/내 머리카락은 투명한 대기 속으로 날아간다. /사과는 거두어들였겠지만/아직 안 거두어들인 공기속으로.'(조정권의 '안 거두어들인' 중)
'여름날은 혁혁하였다//오래 된 마음자리 마르자/꽃이 벙근다/꽃 속의 꽃들/꽃들 속의 꽃이 피어나자/꽃송이가 열린다/나무 전체가 부풀어 오른다'(이문재의 '수국' 중)류 시인에게 포도밭은 21년째 원고지이고 포도는 시다. 그의 시는 나무와 풀들과 이야기하듯 편안하다. 포도농사를 통해 얻은 생명의 소중함과 농사짓는 일의 애환이 곳곳에 녹아있다. 그는 "21년 동안 포도나무를 자식처럼 열심히 돌보았다고 생각했는데,이제 보니 포도나무가 저를 돌보고 있었다"며 "이렇게 포도나무는 제 삶의 뿌리였다"고 했다.
정현종 시인은 머리글에 "시 쓰기는 포도농사와 닮은 데가 있다. 언어란 우리 영혼에 뿌려지는 씨앗인데,제대로 된 씨앗이 심어져서 잘 자라야 그 영혼의 수확이 풍성해진다. 그러니까 우선 마음을 위한 씨앗인 시가 잘 가꾸어지고 잘 익어야 다른 마음들의 강장제가 될 수 있다"고 썼다. 농사를 제대로 짓고 언어를 제대로 쓰고자하는 노력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