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조선시대 여인들은 어떻게 사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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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사랑을 묻다 | 서지영 지음 | 이숲 펴냄 | 328쪽 | 1만5000원
소설·풍속화 속 사랑 통해 자유연애·성의식 엿보기
1932년 12월 잡지 '삼천리'에 '푸로와 뿌르 여학생의 정조와 연애관'이라는 글이 실렸다. '신여성'의 등장으로 변화하는 여성의 성의식을 살펴보기 위해 서울의 한 여학교를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내용이다. '뿌르'(부르주아 · 중역,지주,거상,귀족집 딸)와 '푸로'(프롤레타리아 · 졸업 후 부모와 형제를 부조해야 하는 중산계급 이하 가정의 딸)의 두 부류로 나눠 각각 100명을 조사했는데 "정조를 유지하고 싶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정조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여학생이 과반수(200명 중 107명)를 차지했다. 당시 지식층 여성들의 성의식을 잘 보여준다.
17세기 서포 김만중이 쓴 소설 《구운몽》의 주인공 양소유와 여덟 여인 사이의 자유분방한 다자적 애정관계는 파격적이다. 여성끼리의 동성애적 징후,귀신이나 이계적 존재와의 성애를 허용하는 등 에로스의 판타지가 소설 전반을 관통한다. 유교 이념이 전면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던 당시에 어떻게 이 같은 판타지가 문학적으로 실현될 수 있었을까. 《역사에 사랑을 묻다》는 조선시대부터 근대 초기까지 한국인의 사랑을 문학 등 다양한 자료를 통해 탐색한다. 저자인 서지영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원 연구교수는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에 재현된 성과 사랑,결혼의 서사를 분석하고 그 이면에 열정을 구성하는 당시의 시선을 추적하고자 했다"고 설명한다.
1부 '전근대 사랑의 서사'에서는 중국의 '시경'을 통해 동양문화 속 사랑의 원형을 찾고 조선시대 소설과 풍속화,의궤 등에 드러난 사랑의 역사를 살핀다. 특히 조선 후기 유교 이념이 뿌리내리면서 사랑과 결혼의 전통이 뒤흔들리는 현상에 주목한다. 책은 《구운몽》이 '꿈'이라는 장치를 통해 유교적 규율에 억눌렸던 당시 사람들의 욕망과 무의식을 거침없이 발현시켰다고 분석한다. 낙이불음(樂而不淫 · 즐기되 지나치게 빠지지 말라)의 경계를 넘지 않으면서도 사랑과 혼인의 규범에 균열을 일으키는 특이한 서사라고 평가한다. 저자는 "당시 사랑의 재현은 남녀관계를 탈성애화하는 한편 불륜 · 동성애와 같은 반규범적 열정을 분출하는 이중 구도를 드러낸다"고 말했다.
2부 '근대,구성되는 사랑의 역사'에서는 20세기 초 조선에 서구문화가 흘러들어오면서 근대적 사랑이 어떻게 구성되고 확산됐는지 추적한다.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은 계몽과 개조의 시대이면서 연애의 시대이기도 했다. 당시 베스트셀러는 노자영의 연애서간집 《사랑의 불꽃》이었고,많은 여성은 연애소설에 푹 빠져 있었다. 신여성들은 자유연애를 통해 개인성의 실현,남녀평등,신가정의 형성 등 근대의 혁신적 가치를 부르짖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남녀 간의 성적 위계,뿌리 깊은 인습들과 부딪치면서 좌절을 겪는다. 문학과 역사를 가로지르며 사랑이라는 주제에 천착한 이 책은 다분히 모험적이다. 주류 역사에서 침묵되고 외면돼온 열정,사랑,욕망,성과 같은 주제를 독자적으로 심도 있게 다뤘다는 점에서다. 이 책에서 다양한 문화적 텍스트를 통해 탐색한 사랑의 역사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에 충분하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