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學力 아닌 學歷 인플레를 깨라

정부 '고졸채용 우대' 본질 놓쳐
평준화 폐지…경쟁력부터 높여야
귀속 요인에 의한 차별(discrimination) 철폐는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바람직하다. 본인의 재능 및 노력과 무관한 성차별,지역차별,인종차별은 철폐돼야 마땅하다. 그러나 모든 차별이 비도덕적인 것은 아니다. 재능이나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차이가 드러나는 것을 '차별'이라고 무조건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이 같은 경우의 개념을 '변별'이라고 번역한다.

교육은 변별력을 가져오게 하는 활동이다. 교육을 온전하게 많이 받은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잘 대우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개인과 사회 발전의 동력이 되는 순기능을 한다. 그러나 문제는 능력 증진을 의미하는 학력(學力)이 아닌 '학교 다닌 흔적'인 학력(學歷)이 결정적인 변별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야기된다. 지난 2일 고용노동부 교육과학기술부 기획재정부 등 관계 부처들이 대통령에게 '공생발전 고용사회 구현 방안'에서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취지에서 공기업과 준(準)정부기관에 입사하는 고졸 직원에 대한 '차별'을 없애겠다고 보고한 바 있다. 이들 기관에 고졸 출신 직원은 입사 후 4년이 지나면 대졸 출신 직원과 동등한 자격을 지니며,특성화고등학교와 제조업에 한정됐던 입영연기 혜택도 일반계 고교 출신자들에게 확대 적용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 보고를 받은 대통령은 한 걸음 더 나아가 "공무원을 뽑을 때 의무적으로 고졸을 뽑아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하면서 학력 차이가 가져다주는 부작용을 시정할 것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이와 같은 관계기관의 방침과 대통령의 지시에 원론적으로 반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번 학력차별 철폐조치는 교육구조 개선 없이 현 상황에서 추진하게 되면 부작용만 더 심하게 드러날 것이다.

우리의 학력 차별 현상은 다른 나라와 단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졸자의 80% 이상이 진학하는 기이한 상황과,그 결과 대졸자가 과잉 공급되는 학력(學歷) 인플레이션에 기인한다. 대졸자만을 뽑아도 채용하는 입장에서는 만족할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것이다. 우선 이런 상황에서 고졸자를 뽑아 채용하라고 공기업과 일반기업에 권고 · 주문하는 것은 당장 대졸실업자 문제를 뒷전에 놓겠다는 말로 들린다. 더욱이 기업으로선 고졸자를 채용한 뒤 얼마 안 있어 군입대로 휴직이란 공백기를 가져야 하는 점도 현실적인 어려움이다. 피상적인 해결에 앞서 고려해야 할 근본책은 대학 교육의 내실을 기하는 조치의 선행이다. 취학인구 등을 고려한 대학입학 정원 조정을 포함해 부실대학을 과감하게 퇴출시켜 정예화된 인력 양성을 꾀하는 근본적인 대학구조조정이 있어야 한다. 또 고등학교 학력(學歷)이 신뢰받을 수 있는 조치로 고교 평준화를 폐지해 단위학교의 경쟁력과 책무성을 높여야 한다. 교육 만악(萬惡)의 근원인 평준화 정책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여겨 매번 보완책만 궁리해선 채용 당사자인 기업들이 신뢰할 고졸 인력 배출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번 조치는 대통령이나 정부가 주도하는 고용정책 가이드라인 성격이어서 고졸 취업 희망자들에게나 대학 입학생들에게 그릇된 인식을 심어줄 가능성이 있다. 대부분 학력(學力)의 차이는 임금이나 대우에서 어느 정도의 차이를 인정해주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자칫 대학에 가고자 하는 공부를 등한시하거나 아예 가지 않아도 좋다고 오해하도록 당사자들을 유도한다. 김대중 정부 때 이른바 '이해찬 세대'의 재판이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이제는 사회 초년병이 된 이해찬 세대는 2002년 대학 신입생으로서 '뭐든지 한 가지만 잘하면 누구나 대학에 갈 수 있다'는 1998년 당시 교육부 수장의 말만 믿고 큰 혼란과 손해를 맛보았다. 학력(學力) 증진 여건이 조성되지 않은 현 상황에서 대학 가지 말라는 당국의 '강한 신호'가 몰고올 부작용을 누가 뒷감당할 것인가.

김정래 < 부산교대 교육학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