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라로이드는 사라졌지만…'단 한 장의 추억'은 영원하다

스토리&스토리 - 2030 기자의 아날로그 이야기

발터 베냐민, 사진의 복제성 갈파했지만
즉석 카메라는 '하나의 원본'으로 승부
DSLR 카메라엔 없는 '아우라'가 있다
"카메라는 얼마 안 하는데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지."

김종관 감독이 2004년 발표한 단편영화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대사 한 구절이다. 카메라에 비해 필름 가격 부담이 더 크다는 뜻이다. 여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배우 정유미가 짝사랑하는 남자 선배에게 폴라로이드 카메라 작동법을 배우는 내용이 영화의 전부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카메라를 손에 쥔 여주인공은 셔터를 잘못 눌러 의도치 않은 사진을 찍게 된다. 실수로 남긴 폴라로이드 사진 한 장에 여주인공의 설렘을 고스란히 담고서 6분 남짓한 짧은 영화는 끝을 맞이한다. ◆죽지 않는 즉석 카메라

흔히 즉석 필름 카메라를 가리킬 때 쓰는 단어 '폴라로이드'는 과거 미국의 카메라 회사 이름이다. 1937년 에드윈 랜드가 만든 이 회사는 1948년 상용화된 즉석 필름 카메라를 내놔 수십년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회사는 2000년대 들어 경영난에 시달리다 2008년 8월 파산했다.

폴라로이드는 비즈니스 세계의 뒤편으로 물러섰지만 즉석 카메라 시장은 여전히 성장 중이다. 후지필름이 만드는 즉석 카메라 '인스탁스' 시리즈는 1999년부터 2009년 말까지 10년간 한국에서만 102만대가 팔려나갔고 2010년부터 지난달까지는 43만대가량이 판매됐다. 고성능 디지털일안반사식(DSLR) 카메라가 집집마다 보급된 지금도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카메라의 인기는 여전한 것 같다. ◆원본으로서의 가치

1839년 프랑스의 자크 다게르에 의해 발명된 사진은 두 가지 점에서 혁명적이었다. 하나는 누구라도 쉽게 찍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초상화는 전문적인 능력을 갖고 있는 화가들만 그릴 수 있었고 가격도 비싸 귀족이나 신흥 부유층들만이 소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진이 보급되면서 누구라도 초상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됐다.

다른 하나는 원본의 가치가 작아졌다는 사실이다. 필름이 있다면 똑같은 사진을 무한대로 인화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의 철학자 발터 베냐민은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란 글에서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가 가능해지면서 아우라(aura · 예술작품의 원본에서만 나타나는 독특한 분위기)가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이 같은 사진의 특성은 필름이란 아날로그 매체가 CCD,CMOS 등 디지털 매체로 바뀌면서 더 공고해진 것처럼 보인다. 파일로 만들어진 이미지는 네트워크를 타고 무한대로 복제되며 소비되는 상황이다. 원본을 찾을 수도,찾을 필요도 사라졌다.

하지만 즉석 카메라는 사진의 복제성을 갈파한 베냐민의 명제를 거스른다. 사진임에도 복제가 불가능하다. '아우라'의 가장 큰 조건이 '기술적 복제의 불가능'이라면 즉석 사진에는 아우라가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까.

꾸준한 판매량에서 볼 수 있듯이 '단 하나의 원본'만을 갖는 즉석 카메라의 매력은 여전해 보인다. 유례없는 이미지 홍수의 시대에도 한 장의 원본이 전부인 즉석 카메라를 찾는 까닭은 '폴라로이드 작동법'의 주인공처럼 실수마저도 네모난 필름 안에 고스란히 담아 추억으로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30년 지난 '폴라로이드 랜드' 카메라

기자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한 대 갖고 있다. 생산된 지 30년을 훌쩍 넘긴 '폴라로이드 랜드 340'(사진)이란 모델이다. 많이 알려진 정사각형의 필름보다 큰 '10.8㎝?C8.5㎝' 크기의 필름을 사용한다. 도시락처럼 생긴 뚜껑을 열고 카메라 상단 레버를 누르면 접혀 있던 주름상자가 펴지며 거대한 모습으로 변한다. 셔터를 장전하고 레버를 움직여 초점을 맞춘 뒤 셔터를 누른다. 카메라 뒤판 홈으로 필름을 꺼내 현상되기를 기다렸다가 검은 종이를 떼어내면 단 하나뿐인 사진이 완성된다. 흠이라면 비싼 필름값 정도.

1940년 생을 마감한 베냐민은 폴라로이드 카메라의 출시를 보지 못했다. 그가 이 카메라를 봤다면 과연 뭐라고 말했을까.

이승우 IT모바일부 기자 leesw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