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광철 칼럼] 갈등 빚는 갑부 증세론

선진국서 증세놓고 계층간 갈등
복지지출 통제 못하면 곧 닥칠 일
빚이 산더미처럼 쌓여 정부 파산을 우려하는 미국에서 갑부(슈퍼 리치)가 세금을 더 내자는 애국적 호소에 반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기부 천사로 알려진 투자귀재 워런 버핏이 갑부 증세로 정부를 구하자고 깃발을 들고 나선 터라 반대 목소리는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웬걸.곧바로 소신파들의 반박이 쏟아졌다. 경제전문 미디어인 포브스를 이끌고 있는 스티브 포브스 회장이 즉각 반격의 화살을 날렸다. "버핏이 진정으로 국가 빚을 걱정한다면 자발적으로 돈을 더 낼 수 있는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 다른 갑부들에게까지 세금 인상의 부담을 지우지 마라." 일률적 증세보다는 뜻있는 사람의 자발적 기부가 더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최고경영자인 스티브 발머 회장과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 회장도 포브스 회장편에 섰다. 반면 서민층은 버핏 회장에게 동조하고 있다. 이처럼 선진국에서 갑부 증세 논란이 심각한 사회적 갈등 양상으로 번지고 있다. 부자와 부자 아닌 계층의 이념투쟁으로 비화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얼마 전 이명박 정부 경제철학의 주춧돌인 감세 정책이 야당은 물론 여당의 반발에 부딪쳐 소멸된 것을 보면서 갑부 증세 논란이 오버랩됐다. 우리나라야 법인세와 소득세의 최고 구간에 물리고 있는 세율을 2%포인트 내리려던 방침을 포기한 것이어서 절대 세율을 올리려는 나라와 비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세금이 줄 것으로 철석같이 믿었던 계층이나 기업들에 감세 철회는 사실상 증세나 다름없어 '남의 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감세가 경제활력을 높이는 유효한 수단이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이명박 정부도 불과 몇 달 전까지 감세를 고수했다. 감세가 경제적 자유와 경제적 성장의 지름길이라는 믿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 정부는 야당 아닌 여당의 반발에 밀려 신념을 접어야 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로 만들겠다는 약속도 물거품이 됐다. 물론 경제운용에서 지고지선의 정책이 없듯 감세가 경제활성화에 유일무이한 대안이라고 고집할 수만은 없다. 지지율이 바닥을 헤매고 있는 현실에서 돈 쓸 곳이 많아지는 선거가 다가오는데 대통령이나 여당이 감세를 신주단지처럼 붙들고 있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제는 봇물터지듯 늘어나고 있는 복지지출 수요가 감세 장벽을 무력화시킨 데 이어 어디까지 번질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사회적으로 첨예한 논란을 거듭했던 대학등록금 지원에 내년에만 정부 예산이 1조5000억원이 투입돼야 한다. 비정규직 대책의 하나로 제시된 저소득 근로자의 4대 보험 지원도 예산 뒷받침없인 불가능하다. 청년 창업지원에도 올해보다 2배 이상 많은 49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 그뿐인가. 야당이 벼르고 있는 무상시리즈 (무상급식 · 보육 · 의료) 공세에 따라 어느 정도의 예산이 더 들어갈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정권이 말기로 접어들수록 무책임한 선심 정책은 제동을 걸기가 어려워진다. 나라살림이 화수분이 아닌 이상 세금을 더 걷지 않으면 감당 불가능한 상황을 맞을 것이다. 당장 한두 해는 몰라도 장기적으론 재정이 버틸 수 없다. 지금 분위기로 봐선 우리 사회에서도 '부자 증세' 주장이 나오기는 시간문제다. 선거 판세가 불리해질수록 복지라는 달콤한 약속의 보따리는 두터워지고 이를 채우기 위한 재원 조달은 부자들을 향하기 십상이다. 양극화의 희생양을 찾아 대기업 때리기가 판을 치고 있는 터여서 부유세도 대중의 박수를 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부유세를 거둔다고 해도 급증하는 복지재정 수요를 충족시키긴 어려울 것이다. 구멍난 둑은 터지고 만다. 무엇보다 복지 수요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지 않도록 적절히 통제하는 게 급선무다. 세금을 더 내겠다는 사회적 합의가 없다면 정부의 씀씀이를 무책임하게 늘려선 안 된다. 브레이크가 없는 차는 언젠가 곤두박질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그 위험한 차에 올라탔다.

고광철 논설위원·경제교육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