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구경시켰더니 "따분해…나 판사 안 할래"

법조계 현장스토리…金 검사 & 李 변호사 - 법조인 '자식 키우기'

법조인이니 자식들 공부도…주변 시선 때때로 부담
"아빠 나 공부 못하는 거 나 때문은 아닌 거 알지?"
옛날 실력 믿고 과외 나섰다가 중2 영어가 토플용 교재 '허걱'

법조계 고위 인사 K씨에게 '천추의 한'은 아들이 서울대 법대에 진학하지 못한 것이다. 법조계 지인들이 "우리 애가 이번엔 사법시험 합격해야 할 텐데,본격적으로 공부한 지는 얼마 안 됐지만 말이야…"라는 식으로 걱정을 빙자한 자랑을 늘어놓을 때마다 그는 침묵을 지킨다고 한다. K씨의 한 지인은 "자녀에 대해 '전공이 법학이라고 하지 않았나?어디 갔다고 했지?'라는 질문이 나올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더라"면서 "서울대 법대는 아니지만 명문대에 진학했고 흠잡을 데 없이 잘 키우셨다고 들었는데도 못내 아쉬운 모양"이라고 전했다.

법조인도 여느 부모와 다르지 않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면 괜히 어깨가 으쓱해지고,엇나가면 남 보기 민망한 건 대한민국의 여느 부모와 같다. 그러나 '부모가 법조인이니 자식도 뒤를 이어 2세 법조인이 되겠지' '부모가 교육을 잘 시킬 테니 당연히 공부는 잘하겠지'라는 주변의 시선은 때로는 버겁기도 하다. ◆초등학생 아들을 법정에 보낸 사연

많은 법조인들이 "과대 평가된 직종이다" "우수하다면 다른 과목을 전공하는 게 훨씬 낫다"고 하면서도 내심 자식이 법조인의 길을 걷기 바라는 경향이 있다.

한 부장판사의 아내는 방학을 활용해 초등학생 아들을 법원 재판 방청을 시켰다. 판사들의 '멋진' 모습을 보여줘서 '아버지처럼 법조인의 길을 걷겠다'는 마음을 먹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법정의 답답한 분위기와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법률 용어 때문에 아들은 오히려 "법조인은 따분한 직업"이라는 편견을 갖게 됐다고 한다. 이 부장판사 부부는 아들이 재미있어 할 재판을 찾기로 하고 신중히 검토 작업에 들어갔다. 검찰 고위 간부 출신인 L변호사는 대학 때 예능계 전공을 택해 다른 길을 걷고 있던 자식의 진로를 법조인으로 틀기도 했다. 현재 그 자녀는 준비 2년 만에 사법시험에 합격해 법조인의 길을 걷고 있다.

◆법조인 자녀 몰리면 진학률 오른다?

법조인의 자녀들은 실제로 공부를 잘할까. 다수설은 "주변을 보니 다들 공부를 잘하더라"다. 다수설에 부합하는 법조계의 소문 중 하나는 '법조인 자녀들의 이동에 따라 집값이 올라가고 명문교가 바뀐다'다. 물론 검증된 것은 아니다. 서울남부지법이 목동 부근으로 이전한 뒤 목동의 특정 아파트 단지로 법조인들이 다수 이사하면서 인근 학교의 명문대 진학률이 껑충 뛰었다는 소문도 있다. "모 부장검사 아들이 이번에 의대에 갔다더라." "고위 판 · 검사 자녀 중 대학에 제대로 못 갔다는 이야기는 못 들어봤다. " 이런 얘기가 다수설에 따른다. 소수설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은 아들딸을 둔 부모 법조인들이 말을 못 꺼내서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이라고 반박한다. 법조인 대물림 경향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다. 현직 법조인들이 법조계에 입문한 자녀를 취직 자리까지 알아봐준다는 사실은 사법연수원생과 로스쿨생 사이에서 공공연한 소문이다. P변호사는 "성적도 좋지 않았던 동기가 2년차에 대형로펌에 확정된 이유는 그의 아버지가 고위 법관이어서다,장인도 그 로펌에 힘 좀 써줬다더라 등의 소문이 돌았다"고 전했다.

◆누가 알아줄까… 속으로 끙끙 앓기도

기대치는 높지만 자식이 따라오지 못해 남몰래 속앓이를 하는 법조인 부모들도 많다. '수재' 소리를 듣고 자랐을 법조인 학부모가 평범한 자식에게 만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내가 대신 학교를 다니고 싶을 정도로 아이가 공부를 못한다"고 속상해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의 모 부장판사는 "공부를 왜 안하느냐"며 고등학생인 아들과 거의 매일 말다툼을 했다. 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은 아들은 한동안 정신과 치료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재수생 딸을 둔 한 검찰 고위간부는 "재수 중이라고 지금은 둘러댈 수 있지만 사실 성적이 좋지 않아 내년이 걱정"이라고 털어놓았다. 법조인 자녀 중 법대생은 많지만 막상 사법시험 합격자는 예상 외로 많지 않다. 매년 사법시험 1000명 합격자 가운데 부모가 법조인인 경우는 10명(1%) 안팎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법학 전공 아들을 둔 검찰의 한 간부는 "헝그리 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아들딸 과외선생 자처하는 판 · 검사

옛날 실력을 믿고 직접 자녀들을 가르치려는 부모들도 적지 않다. 모 판사는 사무실에서 '수학의 정석'을 틈틈이 보는 것으로 알려졌다. 초등학교 5학년 아들을 둔 한 검찰 간부는 부인이 10년 이상 외국에 산 덕분에 영어는 부인이,사회과목은 본인이 맡아 가르친다. 대검의 한 과장은 "아이가 중2여서 영어라도 가르쳐 볼까 했는데 학원교재가 토플용이어서 엄두가 안 나더라"고 고개를 흔들었다.

여성 부장검사들은 자녀들의 상당수가 해외유학 중이다. 고등학생들이 많은 편인데 대학은 한국에서 보낼 생각이라 한다. 한 부장검사는 "내 앞가림도 못할 정도로 바빠 사실상 아이를 방치해왔다"며 "사교육이 필요없는 미국에 보내놓으니 그나마 안심"이라고 말했다.

자녀 교육 문제 때문에 변호사 개업에 나서는 판 · 검사도 많다. 등록금이나 각종 뒷바라지를 위해 돈이 더 필요해서다. 지난해 부장검사에서 모 대형 로펌 변호사로 변신한 L씨도 고3의 외아들 때문이었다. 당시 그의 전직에 동료 검사들은 안타까워했다. 이사도 쉽지 않다. 결혼 16년차인 한 부장검사는 그간 5번 이사를 했다. 자주 옮겨서인지 아이들 모두 성적이 신통치 않다는 게 그의 고민거리다. 성적에 대해 한마디라도 하려면 아이들은 바로 반박한다. "아빠,나 성적 안 좋은거 나 때문 아닌 거 알지!"

이고운/임도원/김병일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