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함의 미학 vs 파격과 개성…여성들 열광시킨 '뷰티 워'

스토리 & 스토리 - 세기의 라이벌
(4) 가브리엘 샤넬 - 엘자 스키아파렐리

'20세기 최고의 여성' 샤넬…고아로 자라 한때 카바레 가수로
여성용 바지·허리라인 스커트…"심플한 멋이 우아함의 기본"

'튀는 디자이너' 스키아파렐리…초현실주의서 디자인 영감
치마바지 스포츠웨어 '충격'…"똑같은 옷 입는 건 못 참아"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엉덩이.'여성의 미(美)를 한 가지 잣대로만 평가하던 20세기 초,여자들은 하나같이 작은 볼레로에 넓게 펼쳐진 스커트를 입었다. 높게 틀어올린 머리에 꽃과 베일로 장식한 작은 모자,홀쭉한 우산,손에 드는 핸드백도 필수였다.

이런 패션에 처음으로 반기를 든 사람은 가브리엘 보뇌르 샤넬이다. 샤넬은 어깨에 멜 수 있는 퀼팅백과 승마복을 개조해 만든 여성용 바지를 처음으로 고안하는 등 당시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패션을 선보였다. 아일랜드 극작가이자 비평가인 조지 버나드 쇼가 20세기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퀴리 부인과 함께 샤넬을 꼽을 정도였다. 독보적이었을 것 같은 샤넬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다. 엘사 스키아파렐리.이탈리아 출신으로 1920~1930년대 샤넬과 함께 유럽 패션계를 양분했던 디자이너다. 출신 배경도,추구하는 패션도 전혀 달랐던 두 사람은 질투와 시기 어린 경쟁을 거듭하며 동시대 최고의 디자이너로 살았다. 누군가는 여전히 이름을 떨치고,누군가는 이름조차 희미해졌지만….

●불우한 고아 소녀 vs 부유한 귀족 아가씨

샤넬은 1883년 프랑스 남서부 오벨뉴 지방 소뮈르에서 태어났다. 노점상이었던 아버지와 세탁일을 했던 어머니 밑에서 둘째 딸로 자랐다. 샤넬이 12세 때 어머니가 결핵으로 숨을 거두자 아버지는 가족을 버렸다. 어린 샤넬은 6년 동안 로마 가톨릭 수도원에 있는 고아원에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재봉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18세가 되던 해,샤넬은 고아원을 떠나 카바레 가수로 활동했다. '코코 샤넬'은 이때 생긴 별칭이다. 코코는 그가 부른 '누가 코코를 보았니'라는 노랫말의 강아지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샤넬은 재력가 애인의 후원으로 1910년 파리 캉봉거리 21번지에 모자 전문점 '샤넬 모드'를 연다. 당대의 연극배우 가브리엘 도르지아가 샤넬의 모자를 쓰면서 디자이너로서 커리어가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1913년 프랑스 휴양지 도빌의 부티크에 이어 1919년에는 캉봉거리 31번지에 정식으로 의상실을 등록했다.

어린 시절 불우했던 샤넬과는 달리 스키아파렐리는 부유한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저명한 학자이자 큐레이터였다. 로마대 학장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나폴리 귀족 출신이었다. 소행성 헤스페리아를 발견한 천문학자 조반니 스키아파렐리는 숙부였다. 스키아파렐리 역시 로마대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하지만 대학 시절 음탕한 내용의 시집을 발간해 보수적인 집안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프랑스 백작과 결혼해 미국에서 살던 스키아파렐리는 1927년 이혼한 뒤 파리로 거취를 옮겼다. 1933년 선보인 파고다 슬리브(아래로 향할수록 넓게 퍼지는 소매)가 선풍적 인기를 모으자 2년 뒤 의상실을 열었다. 미국 여배우 매 웨스트,테니스 선수 릴리 알바레스 등이 주요 고객이었다.

●단순함의 미학 vs 기이한 아름다움

샤넬의 패션은 단순하고 실용적이다. 그는 1926년 발목이 드러나 보이는 '리틀블랙드레스'를 발표했다. 프랑스 패션잡지 '보그'는 샤넬이 만든 이 드레스를 당시 대량생산을 시작한 포드 자동차 모델T에 비유하며 극찬하기도 했다. 샤넬은 같은 해 '옷이 우아하기 위해서는 움직임이 자유로워야 한다'며 트위드 재킷을 선보이기도 했다. 트위드는 얼룩덜룩한 색과 거친 질감을 가진 직물이다. 주로 겨울철 옷에 쓰이던 트위드가 샤넬의 손을 거쳐 실용적이면서 은근한 멋이 있는 옷으로 탄생했다. 그는 "단순함(simplicity)은 모든 진정한 우아함의 기본"이라는 말로 자신의 패션철학을 설명했다. 단정하고 단아한 샤넬의 패션에 매료된 여성들에게 스키아파렐리는 완전히 다른 패션을 선보였다. 초현실주의적인 그의 옷은 특이하고 기괴했다. 자유분방하면서 역동적인 디자인,화려한 색깔로도 유명했다. 살바도르 달리,알베르토 자코메티,장 콕토 등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어울려 지내면서 영감을 받았다. 그는 "전 세계 여자들이 똑같이 옷을 입는다면 그것은 서로를 짜증나게 만들기 위해서다"라고 말했다.

스키아파렐리는 스포츠웨어의 선구자인 샤넬에게 도전하기도 했다. 샤넬은 남성 속옷에 주로 쓰였던 소재인 저지(가벼우면서 신축성 있고 두꺼운 메리야스 직물)를 여성복에 처음으로 사용하는 등 여성용 스포츠웨어를 처음으로 고안한 디자이너다. 반면 스키아파렐리는 과감하고 대범한 디자인의 스포츠웨어를 발표했다. 테니스 선수 알바레스는 스키아파렐리가 디자인한 테니스 스커트를 입고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다. 치마바지로 디자인된 스키아파렐리의 스커트는 당시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을 던져줬다.

힘겹게 프랑스 상류 사회에 진출한 샤넬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사교계를 주름잡은 스키아파렐리를 질투했다. 스키아파렐리가 빨간 가재 그림이 그려진 기이한 드레스를 선보이면 샤넬은 보수적인 디자인의 블랙 드레스를 내놓았다. 극과 극을 달리던 두 사람은 호사가들로부터 늘 비교당했다. 샤넬은 스키아파렐리를 칭할 때는 이름을 부르는 대신 '옷 만드는 이탈리아 여자'라고 폄하했다. 스키아파렐리가 주로 디자인했던 긴 드레스를 경멸한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스키아파렐리 또한 샤넬을 '음울한 부르주아지'라고 공격했다.

●시대가 낳은 패션 디자이너들

상반되는 패션 스타일을 가진 두 디자이너가 거의 같은 시기에 주목받았던 이유는 당시 빠르게 변했던 시대상 때문이다. 샤넬이 특히 명성을 얻었던 1920년대는 1차 세계대전 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높아지면서 여성해방운동이 활발해지고 있던 시기다. 가슴과 엉덩이 라인을 강조하는 여성스러운 패션보다 직선적이면서 활동적인 패션이 유행했다. 곡선적이고 길이가 긴 스커트 대신 무릎까지 내려오는 길이에 허리라인이 낮은 '샤넬 라인' 스커트가 인기를 끌었던 이유다.

스키아파렐리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1930년대는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전 세계가 불황에 허덕이던 때다. 이 시기 나일론,아세테이트 등 합성섬유가 개발되고 지퍼도 발명됐다. 패션은 유행보다 개인적인 기호를 따르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여성복은 비활동적이고 우아한 면이 중시됐다. 내려갔던 허리선이 제자리로 오고 스커트 길이는 길어졌다. 어깨에 패드를 넣어 어깨와 가슴선을 강조한 스키아파렐리의 패션이 관심을 끌었던 배경이다.

●최후의 승자는

평행선을 달릴 것 같았던 둘의 경쟁은 2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막을 내린다. 독일군에 의해 프랑스가 점령당하자 샤넬은 의상실을 접고 파리에 있는 리츠호텔에서 생활했다. 전쟁 중에는 독일군 장교와 연애를 하며 나치의 첩보원으로 활동했다. 때문에 연합군이 승리한 뒤 한동안 프랑스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4년 파리로 온 샤넬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패션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당시 '왜 다시 일을 시작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심심하게 죽고 싶지는 않다"고 답했다. 샤넬의 패션은 나치에 협력한 그의 전력 탓에 프랑스에서는 외면받았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 사람들은 열광했다. 실용적이고 단순한 그의 패션은 전후 여성의 사회적 진출 확대와 맞물려 갈수록 영향력이 확대됐다.

스키아파렐리도 전쟁 기간 중 프랑스에서 사업을 접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전쟁이 끝난 뒤 프랑스 패션계로 돌아왔지만 예전만큼 명성을 되찾지는 못했다. 결국 샤넬이 복귀한 해에 스키아파렐리의 의상실은 완전히 문을 닫았다. 이후 언론에 얼굴을 비치기도 하고 '마이 쇼킹 라이프'라는 책도 펴냈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갔다. 여성이자 패션 디자이너였다는 사실 외에 샤넬과 스키아파렐리 사이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든 듯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닮은점이 있다. 누구보다 일을 사랑하고 삶을 주체적으로 마주했던 여성이었다는 것.샤넬은 "나는 항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뭔가 해서 실패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해 왔다"고 말하곤 했다. 스키아파렐리가 남긴 말도 다르지 않다. "최선을 다해라.용감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즐겁게 일해라."

조미현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