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양승태 신임 대법원장의 과제

공판중심 감상적 이상론 벗어나야…검찰·변호사단체 사법역할 존중을

문영호 < 법무법인 태평양 변호사 / 객원논설위원 >
양승태 신임 대법원장이 취임했다. 대법원장의 상징성과 영향력이 크다 보니 사법부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고 할 수 있다. 될 사람이 됐다는 평가가 우세한 가운데 기대가 큰 만큼,앞으로 신임 대법원장에게는 법조계 안팎에서 이런 저런 주문이 쏟아질 것이다.

양 대법원장이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는 편향판결시비의 불식,양형기준의 정착,대법관구성의 다양화 등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그 동안 전임 대법원장 시절에 있었던 사법운영의 왜곡을 바로잡는 것이 그 무엇보다 시급하다고 본다. "공판을 제대로 하려면 수사기록을 집어 던져라." 5년 전 이용훈 전 대법원장이 공판중심주의를 강조하며 일선 법관들에게 한 말이다. 법정에서 심리는 대충대충하고 판사실에서 읽어본 기록에 의존해 유 · 무죄를 판단하는 종래의 관행에서 벗어나라는 뜻이다. 그 이후 임기 내내 공판중심주의는 이용훈 사법부의 최우선 화두가 됐다.

공판중심주의란 유 · 무죄의 심증을 법정에서 구술심리를 통해 형성하라는 원칙이다. 밀실이 아닌 공개법정에 모든 증거를 드러내고 이를 토대로 판단을 내리라는 거다. 이런 공판중심주의는 형소법 제정 이후부터 줄곧 추구해 온 것이지만,과중한 사건 부담 속에서 많은 사건이 동시에 진행되다 보니,실제 재판에서 구현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공판중심주의를 본래의 취지대로 구현하자는 것을 반대할 사람이 있을 리 없지만,공판중심주의를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수사기록을 집어 던질 일은 아니라고 본다. 수사기관의 노력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법정에서 모든 조사가 처음부터 다시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할 뿐 아니라 사법낭비가 될 수도 있다. 더구나 거짓말이 난무하는 우리의 법정현실을 고려하면,허위진술에 대한 방지장치 없이 법정에서 모든 진실을 밝히겠다는 생각은 감상주의적 이상론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특히 뇌물사건이나 조직폭력 사건의 경우에 공판중심주의의 허점이 쉽게 드러난다. 인정에 끌려,그리고 보복이 두려워 범법자의 지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불리한 증언을 하는 것을 꺼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공판중심주의를 구현하는 과정에서 불구속 원칙이 필요 이상으로 확대된 것은 아닌지도 차제에 짚어보아야 할 것이다. 구속영장기각률이 꾸준히 높아져 지난 6년 동안 구속인원이 절반 이하로 줄었다고 한다. 그렇게 구속인원을 줄여 나가는 과정에서 불구속이 원칙이라는 명분하에 수사의 속성을 무시한 영장기각으로 수사기관과 갈등을 빚은 경우도 있었다고 본다.

물론 공판중심주의가 제대로 구현되자면 피고인을 불구속 상태에 두어 방어권을 충분히 행사하도록 해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증거인멸의 방지라는 현실적 필요 때문에 밀행성을 기본으로 하는 수사절차에서는 피의자의 신병확보가 불가피한 경우가 적지 않다고 본다. 수사기관의 의견을 존중해 일단 구속하더라도 기소 후 법원에서 보석 등을 통해 과감하게 풀어주면,얼마든지 불구속재판 원칙을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속을 폭넓게 허용하되 경찰수사단계에서부터 보석을 과감하게 허가하는 미국의 경우가 바로 그러하다. 형사소송의 구조나 재판절차 운영은 현실에 기반을 둘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인력과 물적 설비를 고려하지 아니하고 이상론에 치우치다가는 국가 형벌권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 범죄피해자가 양산되고 사회안전이 크게 위협받는 상황에 빠지지 않으려면,끊임없이 생겨나는 범죄사건을 어떻게든 효율적으로 처리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아무쪼록 이상론에 치우진 공판중심주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신뢰받는 사법부,검찰이나 변호사 단체 등이 형사사법에서 차지하는 역할을 존중해 주는 성숙한 사법부를 만들어 나가길 신임 대법원장에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