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회사 '대포폰 쓰나미'…조폭부터 정치인까지 '고객'

뉴스 인사이드 - 경찰팀 리포트

지능화되는 범죄 수법
노숙자 명의로 법인 설립 후 대리점 돌며 7~10개씩 개통…보스급 1주일 7000만원 챙겨

主고객은 밀입국자·조선족
국제전화 요금 수백만원 안 내…통신업체 年 피해액 100억대

점조직 운영…추적경로 끊겨
퀵서비스로 '다단계 배달'…공급책 등 몸통 잡기 힘들어

A통신사 대포폰 피해대책팀 관계자들이 최근 서울 마포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수사과장 권은희)을 찾았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고액 통신료 미납자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 대책마련이 시급해서다. 이 관계자들은 고액 미납자 명단과 피해금액 등 대포폰과 관련됐을 것으로 의심되는 고객들의 상세정보를 지능팀 수사관들에게 넘기고 대포폰 사기단 검거를 의뢰했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500만원 이상 고액 통신료 미납자가 한 달에 50건 이상"이라며 "한두 달 쓰고 종적을 감추는 대포폰 통신요금 미납자들이 늘어나 연간 피해액만도 수십억원을 넘어서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갈수록 지능화되고 대범해지는 '대포폰(사용자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 명의로 개통된 핸드폰)' 생산 · 유통업자를 검거하기 위해 경찰과 통신회사가 손을 잡았다. 대포폰이 거의 모든 지능범죄에 기본 수단으로 사용되면서 골머리를 앓아온 경찰과 수수방관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는 피해규모에 놀란 통신사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다.

마포경찰서 관계자는 30일 "보이스피싱은 100% 대포폰을 이용하고 있고,대출 관련 사기나 중개수수료 사기,심지어 개인 간 상거래에서도 대포폰이 사용되고 있다"며 "대포폰 유통 수단은 날로 정교해져 이로 인한 사회적 피해는 점점 늘어가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유령법인 세워 1주일 7000만원 수입도몇 해 전까지만 해도 노숙자 등에게 20만~30만원을 쥐어주고 이들의 신용정보로 대포폰을 만들었지만,최근엔 대부분 '유령법인'을 통해 대포폰이 대량 생산되고 있다.

먼저 대포폰 개설업자는 신용이 깨끗한 노숙자 등에게 10만~20만원을 주고 인감증명과 인감도장,주민등록 사본과 등본을 사 '유령법인'을 만든다. 법인을 설립하는 데는 100원이면 된다. 설립된 법인 명의로 '개미'로 불리는 조직원들이 전국 통신사 대리점에서 통신사 별로 7~10대씩 대포폰을 개통한다. '개미'들은 매주 중간책을 통해 30만~50만원의 주급을 받는다. 그렇게 만들어진 대포폰은 유령법인의 실제 보스에게 넘겨져 대포폰 유통업자에게 대당 50만~100만원씩에 팔아넘긴다. 경찰 관계자는 "법인을 여러 개 가지고 있는 대포폰 제조 일당 두목은 1주일에 6000만~7000만원도 거뜬히 번다"고 전했다.

기자가 인터넷에 오른 광고를 보고 대포폰 유통업자에게 전화로 "대포폰을 개통하고 싶다"고 하자 "40만원에 퀵 배달비용 1만5000원이면 주문한 뒤 1시간 반 만에 받아볼 수 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한 달 안에 대포폰이 죽으면 애프터서비스(AS)도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대포폰을 만드는 사람들과 유통하는 사람들은 점조직으로 움직여 수사망에도 쉽게 걸려들지 않는다. 대포폰 유통업자들은 대포폰을 팔 때 퀵서비스를 이용해 배달하거나 다방 등에서 만나 '현찰 박치기'를 하는 방법으로 수사망을 피한다. 수령인에게 물건이 도착할 때까지 퀵 서비스를 여러 번 이용하는 '다단계 배달' 방법을 사용하고 있어 현장을 덮치더라도 공급책 등 몸통을 잡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지난 3월 유령회사 500여개를 설립해 대포폰을 불법판매한 일당을 잡아들인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대포폰 제조 일당들은 조직원끼리도 잘 알지 못할 뿐더러 조직 보스의 이름이 뭔지도 모르고 제조 일당과 유통 일당 간에도 일면식이 없는 경우가 많다"며 "수사 단계마다 추적 경로가 끊겨 일당을 검거하는 데 8개월 넘게 걸렸다"고 말했다.


◆조폭에,조선족과 정치인들까지 필수품대포폰 사용자들은 합법적으로 휴대폰을 발급받을 수 없거나 통화 내용을 숨기고 싶은 사람들이다. 사설도박장 운영자,조직폭력배 등 검찰이나 경찰의 수사선상에 오를 가능성이 있는 이들이 대포폰의 '주고객'이다. 정치인이나 고위 공무원들도 은밀하게 대포폰을 이용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도 · 감청 공포 때문이다. 지난해 청와대 직원이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에 대포폰을 지급,민간인 불법사찰의 증거를 인멸하는 데 사용했다는 '청와대 대포폰'이 대표적인 사례다.

유령법인을 통해 만들어진 대포폰의 수명은 길어야 두세 달이다. 두세 달간 요금이 미납되면 통신사 측에서 휴대폰을 정지시키기 때문이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휴대폰 개통이 불가능한 밀입국자나 조선족들이 대포폰을 많이 사용한다"며 "국제전화를 쓰느라 600만~700만원의 '요금폭탄'을 쏘는 장본인"이라고 귀띔했다.

◆통신사, 피해대책팀까지 만들어

대포폰을 이용한 보이스피싱 등 시민들의 피해 못지않게 통신사들도 대포폰 악몽에 시달린다. 유령법인 명의의 대포폰을 산 사람들은 한두 달 동안 국제통화 등 600만~700만원 상당의 통화료를 내지 않고 휴대폰을 버린다. 미납된 고액의 요금은 통신사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 관계자는 "국내 통신 3사의 연간 피해액이 족히 100억원은 될 것"이라며 "피해금액이 늘어나자 통신사들은 대포폰 피해대책팀까지 만들어 대응책 마련을 강구 중"이라고 전했다.

경찰 측은 "법인 명의의 휴대폰을 발급할 때 요금 지불능력을 담보할 수 있는 매출실적 등의 서류와 법인 존속 연수 등 법인 신용에 대한 평가가 절실하다"며 "하지만 휴대폰 발급에 급급한 통신사들이 이를 잘 지키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통신사로선 그리 간단치 않다는 입장이다. 법인 명의 휴대폰이 필요한 신생법인의 경우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한 통신사 관계자는 "대포폰 업자들은 사무실 전세계약서까지 들고 와 휴대폰을 만들어가는 치밀함을 보인다"며 "유령법인 여부는 직접 사무실로 가서 확인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