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헌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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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주머니 속의 이십원을 꺼내 놓고 허투루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혁명적으로 살아야 한다. 계산적으로 살아야 한다. 대한서점에 가서 점찍어 둔 책이나 살까. K는 싸게 사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몰래 책의 몇 페이지를 뜯어 싼값에 산 뒤 집에서 테이프로 붙여 보는 것이다. '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작가 김승옥의 단편 '싸게 사들이기'(1964) 중 일부분이다. 빠듯한 형편에 헌책 한 권 사기도 버거웠던 1960년대의 풍경이다. 소설 속 대학생뿐이랴.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중고생과 성인 할 것 없이 헌책방을 찾았다. 새책을 살 돈이 없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엔 부모에게 받은 새책 값을 술값으로 날리고 헌책을 사려는 대학생도 있고,절판된 옛책을 구하기 위해 들르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의 경우 1970년대 초 지하철 건설과 함께 동대문에서 청계천으로 옮겨간 헌책방엔 없는 책이 없었다. 참고서와 교재,사전,문학전집과 철학 · 법학 · 공학 책부터 철 지난 잡지까지.헌책의 모습은 가지가지다. 누군가 정성껏 밑줄을 쳐놓은 것도 있고,앞쪽만 읽다 말아 중간 이후는 말끔한 것도 있고,아예 새책이나 다름없이 깨끗한 것도 있다.
헌책은커녕 새책도 안 팔린다는 가운데,영국의 헌책 마을 '헤이온와이' 창시자 리처드 부스가 '파주북소리 2011'(10월1~9일) 행사에서 했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헌책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제공한다. 국가별 번역서로 되살아나는 헌책 속엔 오랜 기간 쌓인 지혜가 담겨 있다. 헌책방은 지적 관광자원이다. "책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킬러콘텐츠다. 5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 뒤엔 1000부도 소화되지 않은 채 절판되는 책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좋은 책과 팔리는 책은 다르다. 베스트셀러를 샀다 황당하고 허망해 가슴을 치는 일이 적지 않다. 반대로 헌책을 읽다 횡재하는 수도 있다. 내용도 내용이요,낡은 듯 진지한 번역이 어설프고 매끄러운 의역보다 가슴에 더 잘 와닿는 까닭이다.
재활용(re-cycling)보다 재사용(re-using)이 중요하다는 마당이다. 오늘의 새책은 내일의 헌책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베스트셀러 신간을 좇기보다 헌 책일지언정 검증된 고전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 손때 묻은 책을 지니는 기쁨도 누릴 수 있을 테니.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g.com
'무진기행'으로 유명한 작가 김승옥의 단편 '싸게 사들이기'(1964) 중 일부분이다. 빠듯한 형편에 헌책 한 권 사기도 버거웠던 1960년대의 풍경이다. 소설 속 대학생뿐이랴.1970년대는 물론 1980년대까지 중고생과 성인 할 것 없이 헌책방을 찾았다. 새책을 살 돈이 없어서인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개중엔 부모에게 받은 새책 값을 술값으로 날리고 헌책을 사려는 대학생도 있고,절판된 옛책을 구하기 위해 들르는 사람도 있었다.
서울의 경우 1970년대 초 지하철 건설과 함께 동대문에서 청계천으로 옮겨간 헌책방엔 없는 책이 없었다. 참고서와 교재,사전,문학전집과 철학 · 법학 · 공학 책부터 철 지난 잡지까지.헌책의 모습은 가지가지다. 누군가 정성껏 밑줄을 쳐놓은 것도 있고,앞쪽만 읽다 말아 중간 이후는 말끔한 것도 있고,아예 새책이나 다름없이 깨끗한 것도 있다.
헌책은커녕 새책도 안 팔린다는 가운데,영국의 헌책 마을 '헤이온와이' 창시자 리처드 부스가 '파주북소리 2011'(10월1~9일) 행사에서 했다는 말은 인상적이다. "헌책은 대학도서관과 공공도서관을 능가하는 방대한 양의 지식을 제공한다. 국가별 번역서로 되살아나는 헌책 속엔 오랜 기간 쌓인 지혜가 담겨 있다. 헌책방은 지적 관광자원이다. "책은 영화와 마찬가지로 킬러콘텐츠다. 50만부 이상 팔리는 베스트셀러 뒤엔 1000부도 소화되지 않은 채 절판되는 책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좋은 책과 팔리는 책은 다르다. 베스트셀러를 샀다 황당하고 허망해 가슴을 치는 일이 적지 않다. 반대로 헌책을 읽다 횡재하는 수도 있다. 내용도 내용이요,낡은 듯 진지한 번역이 어설프고 매끄러운 의역보다 가슴에 더 잘 와닿는 까닭이다.
재활용(re-cycling)보다 재사용(re-using)이 중요하다는 마당이다. 오늘의 새책은 내일의 헌책이다. 겉만 번지르르한 베스트셀러 신간을 좇기보다 헌 책일지언정 검증된 고전을 구해보는 건 어떨까. 손때 묻은 책을 지니는 기쁨도 누릴 수 있을 테니.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