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비겁한 기업들

누가 우파의 핵심인가
누가 날 지켜주는가

조일훈 IT모바일부장 jih@hankyung.com
한국 재계는 오합지졸이다. 사령탑도,전략도 없다. 언제나 선택은 각자도생이다. 나쁘게 표현하면 '나만 살면 그만'이라는 식이다.

박원순 변호사가 이끄는 '아름다운 재단' 문제도 마찬가지다. 대기업들의 기부금 성격을 놓고 거센 논란이 일고 있는데도 어느 기업 하나 입을 떼는 곳이 없다. 이례적으로 많은 기부금을 낸 것으로 알려진 기업들도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참여연대가 지배구조를 비판한 기업들이 대부분이다. 참여연대는 박 변호사 주도로 창립된 단체다. 이들 기업이 '아름다운 재단(가게)'에 기부금을 낸 뒤 참여연대의 공격이 그쳤다는 게 현 논란의 핵심이다. 박 변호사를 모질게 공격하는 측에서는 "기업들의 약점을 빌미로 사실상 돈을 뜯어낸 것"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이 돈의 일부가 '공익활동 지원'이라는 명목으로 친북 · 반미 활동에 관여한 좌파 · 진보 시민단체에 넘어갔다는 주장이다.

해당 기업들엔 공식적인 해명 대신 수군거림만 있을 뿐이다. "아름다운 재단이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기부했겠느냐"는 제 3자적 자조나 비아냥들이다. 총선 · 대선을 들먹이며 "내년이 걱정"이라는 얘기도 잊지 않는다.

그런 걱정들이 산처럼 쌓여가도 현실은 바뀌는 게 없다. 이미 '일감 몰아주기' '승자 독식'에 대한 정치권의 파상 공세로 대기업은 '악의 축'으로 매도된 상태다. 성장과 고용의 산실이 아니라 인색하고 탐욕스런 집단으로 각인돼가고 있다. 상생과 나눔을 아무리 떠들어봤자 소용없다. '안철수 신드롬'은 미래 권력 향배의 방향타가 됐다. 박 변호사는 서울시장 당선 여부에 관계없이 현실 권력이다. 모두 대기업 공격으로 '재미'를 본 사람들이다. 기업들은 누군가 나서서 이런 상황을 타개해주길 바라는지 모르지만,가망 없는 바람이다. 세칭 '우파 보수'더러 잘하라고 하는데,정작 우파의 중추는 자신들이다. 역사적으로,구조적으로,실질적으로 그렇다. 헌법적 가치이자 보수의 핵심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기업활동의 자유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시장경제의 파수꾼은 당연히 기업들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자신을 보호하고 스스로 지켜내겠다는 움직임을 찾아볼 수가 없다. "개별 기업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하겠지만,문제는 역량이 아니라 의지와 용기다. 전경련 회장의 기자회견을 구경한 지도 벌써 아득하다. 대부분의 그룹들이 회장직을 거절해온 마당에 어렵사리 수락한 사람에게 '모진 역할'을 주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사자들이 나서지 않는다면 누구도 도울 수 없다.

현실정치에 개입하거나 참여하라는 게 아니다. 그래서도 안된다. 나라 걱정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니는 충정이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얘기다. 박 변호사는 "평생 공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강변한다. 그렇다면 그를 두려워하는 기업들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공익과 사익의 이분법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를 갈랐던 흑백논리만큼이나 위험하다. 국감 시즌이 되면 기다렸다는 듯이 총수들이 해외로 출국하고, 자신들이 낸 기부금이 어디로 흘러가든 상관없다는 투의 자세로는 늘 자승자박이요,제 발등 찍는 일만 되풀이될 뿐이다.

조일훈 IT모바일부장 ji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