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아용 가구는 수명 짧다?…'어린이와 함께 자라는 가구'로 롱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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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Practice1974년 7월 어느날, 투자은행 모건스탠리가 적대적 인수·합병(M&A) 자문이라는 새 사업에 진출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무도 적대적 M&A를 염두에 두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모건스탠리가 물꼬를 트자 투자은행들은 높은 수수료와 막대한 성공보수를 노리고 앞다퉈 적대적 M&A 시장에 뛰어들었다.
세계적 유아용품 업체 노르웨이 스토케
성장따라 높이조절 '트립트랩'…입소문 마케팅으로 대박
눈높이 유모차 '익스플로리'…타임 "가장 위대한 발명품"
저출산 한·중서 폭발적 인기
화이트 헤드 골드만삭스 회장의 고민은 깊어졌다. ‘돈을 벌 것인가, 고객을 위하는 길을 갈 것인가.’ 헤드 회장은 “고객을 위해 어떤 적대적 인수·합병에도 관여하지 않겠다”고 결론내렸다. 막대한 인수비용, 피인수회사의 거부감 등 부작용 때문에 양측 모두에 도움이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얼마 뒤 적대적 M&A의 타깃이 된 기업들이 방어 자문을 받기 위해 골드만을 찾기 시작했다. 다른 기업들도 신뢰할 수 있는 은행을 찾아 골드만 창구를 두드렸다. 헤드 회장의 고객 중심 철학은 골드만삭스가 세계 최대 투자은행으로 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됐다.유아용품 업계에도 눈앞의 이익보다 고객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고 제품을 만들어 명품업체로 성장한 회사가 있다.
‘유모차 업계의 벤츠’로 불리는 ‘익스플로리(Xplory)’를 판매하는 노르웨이 유아용품 업체 스토케(Stokke)다. 스토케는 ‘어린이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In the best interest of the child)’ 기업이라는 비전을 기반으로 세계적인 유아용품 업체로 성장했다. ◆ ‘어린이(고객)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라’
1972년 스토케의 디자이너 피터 옵스비크는 어린 아들과 식사를 하다 매우 불편해하는 모습을 발견했다. 어른용 의자에 앉은 아들의 발은 허공에 떠 있고, 팔은 테이블에 닿지 않아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옵스비크는 생각에 잠겼다. 어린이들을 위한 식탁용 의자를 만들면 어떨까. 하지만 시장성이 없어 보였다. 어린이들은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때문이다. 어떤 부모도 성장하는 아이를 위해 매년 식탁용 의자를 새로 구매하지는 않는다.옵스비크가 찾은 해법은 어린이의 성장단계에 따라 높이와 다리받침이 조절되는 의자였다. 스토케가 매년 새로운 식탁용 의자를 팔지는 못해도, 어린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의자라고 생각하고 설계를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유아용 의자 ‘트립트랩(Tripp Trapp)’이 탄생했다.
출시 당시 생소한 유아용 의자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썰렁했다. 그러나 제품에 자신 있었던 스토케는 1000개의 트립트랩을 무작정 제작했다. 이 제품을 육아 전문가들에게 나눠줬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전문가들은 트립트랩이 불편한 자세로 인한 스트레스를 없애고, 가족들과 같은 식탁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해줘 어린이의 정서와 유대감, 사회성 발달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하기 시작했다.
자세 교정을 통해 어린이들이 바른 체형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분석도 나왔다. 전문가들의 평가와 입소문에 힘입어 트립트랩은 노르웨이는 물론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서 유아용 의자 판매 1위 제품으로 성장했다. 지난해까지 38년간 트립트랩은 전세계 50여개국에서 700만개 이상 팔려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일반화된 입소문 마케팅을 스토케는 1970년대에 선보인 셈이다.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스토케는 여세를 몰아 2003년 유모차 ‘익스플로리’를 선보였다. 트립트랩에 바퀴를 달아보기로 한 것. 어린이의 눈높이를 고려한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익스플로리 역시 대성공을 거뒀다. 보통 유모차는 좌석 위치가 낮고, 부모가 뒤에서 밀도록 돼 있어 어린이와 부모가 눈을 맞추지 못하는 단점이 있다. 반면 익스플로리는 주행중에도 어린이와 부모가 눈을 맞추고 교감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높낮이는 물론 좌우 최대 170도까지 각도 조절이 가능해 아이가 다양한 각도로 볼 수 있도록 했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2004년 익스플로리를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로 선정했다. 독일 최고 권위의 소비자 기관 슈티프퉁 바렌테스트(Stiftung Warentest)도 ‘최고의 유모차’로 꼽았다.
◆‘유아용 가구는 한때’라는 통념을 깨다유아용 가구는 어린이가 자라면 쓸모 없어진다는 단점을 깨기 위한 스토케의 노력은 트립트랩에서 멈추지 않았다. 스토케는 1990년대 들어 ‘어린이와 함께 자라는 가구’라는 콘셉트를 도입했다. 그 결과 탄생한 제품이 1999년 내놓은 유아용 침대 ‘슬리피(Sleepi)’와 2001년 출시한 기저귀 교환대 ‘케어(Care)’다.
슬리피는 어린이가 성장함에 따라 침대 길이의 조절이 가능하다. 필요에 따라 유아용 미니요람에서부터 어린이용 침대, 침실용 의자로까지 변형 가능하다. 케어는 아이가 어릴 때는 유아용 기저귀 교환대로 사용하다가 크면 공부용 책상, 책꽂이로 바꿔 활용할 수 있다.
출시한지 40년이 지난 지금도 트립트랩은 스토케 전체 매출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잘 팔리고 있다.스토케는 내구성을 강화해 아버지에서 아들로, 어머니에서 딸로 대를 이어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유아용 제품의 수명이 짧다는 통념을 깨기 위한 시도다.혁신적 디자인은 유행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는 스토케의 또다른 강점이다.
어린이 고객에 집중해온 스토케는 한 눈을 팔 사이가 없었다. 개발한 상품 모두 어린이용 가구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1932년 설립후 80년간 ‘어린이’라는 고객에 집중한 것이 유아용품 업계의 명품회사로 성장한 비결인 셈이다.
◆인구구조 변화에 주목한 명품 마케팅
품질에 자신있던 스토케는 마케팅에도 공을 들였다. 이 회사가 주목한 것은 인구구조 변화다. 고가 육아용품이 잘 팔리는 저출산 국가를 위주로 명품 마케팅을 펼쳤다. 명품 마케팅이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국가는 한국이다. 스토케는 한국 유아용품 시장에서 부모·조부모·외조부모에 골드미스인 30대 고모·이모까지 가세한 8명이 한 어린이를 위해 주머니를 터는 ‘에잇 포켓 원 마우스(8 pocket 1 mouth)’ 소비행태가 나타난다는 점에 초점을 맞췄다.
익스플로리의 한국내 판매가격은 대당 179만원.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한국은 전세계에서 익스플로리가 가장 많이 팔리는 시장 가운데 하나다. 2006년 한국에 첫 선을 보인 익스플로리는 지난해 7000여대 가량 팔렸다. 스토케 관계자는 “한국 엄마들은 다른 소비를 줄이더라도 아이한테 만큼은 가장 좋은 것을 주려고 한다”며 “최근에는 하나 뿐인 조카에게 이왕이면 비싼 것을 사주려고 하는 골드 앤트(Golden Aunt)들도 주요 고객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스토케는 한국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작년부터 중국 시장 공략도 강화하고 있다. 중국도 대도시를 중심으로 저출산 현상이 심화되고 있어 한국과 비슷한 소비행태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에바 헤드버그 스토케 아시아태평양지역 부사장은 “중국 프리미엄 유아용품 시장을 겨냥해 다양한 마케팅을 펼치고 있다”고 말했다.
전설리 기자 slj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