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를 뛰어넘은 비극적 사랑…시대를 관통하는 뜨거운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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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 한경 47주년 기념 오페라 '가면무도회'"저 마른 줄기로부터 약초를 뜯어 내 손에 쥐고 나면/내 마음을 사로잡던 존재가 사라지게 될 텐데…./나에게는 무엇이 남으리 사랑을 잃게 되는데/내게 무엇이 남으리 오,불쌍한 영혼이여/오 주여 날 지탱해 주소서,도와주소서!이 불쌍한 영혼에 자비를 베푸소서!"
선 굵은 음색과 묵직한 울림
관객들 '브라보' 연발하며 박수
아멜리에 역의 소프라노 임세경이 남편 레나토와 국왕 리카르도 사이에서 괴로워하는 마음을 노래하며 2막의 문을 열자 객석에선 탄성이 쏟아졌다. 안정적인 중저음과 부드럽게 치고 올라가는 고음까지 완벽하게 소화해낸 그녀에게 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은 "브라보"를 연발하며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국립오페라단과 한국경제신문 공동으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13일 막을 올린 베르디의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세계 무대에서 활약 중인 한국 성악가들이 화려한 공력을 뿜어내는 자리였다. 소프라노 임세경 · 정시영,테너 정의근,바리톤 고성현의 하모니에 관객들은 크게 환호했다.
이 작품은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가 실제로 궁정 극장의 가면무도회에서 암살당한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했다. 국왕 리카르도가 가장 친한 친구이자 충신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에를 사랑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비극이다. 인격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 캐릭터인 리카르도 역 테너의 비중이 큰 작품이어서 '테너의 오페라'라고도 불린다.
테너 정의근은 때론 부드럽고 아름다우며,때론 생기 발랄하면서도 고뇌 어린 목소리와 표정으로 총 3막의 오페라를 차분히 이끌었다. '라 보엠'의 로돌포 역으로 독일 오페라 매거진 오펀벨트에서 '올해의 테너'로 선정될 만큼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그다. 충복이자 동료인 레나토의 아내 아멜리에를 사랑하게 되면서 겪는 마음의 고통과 번뇌,그녀의 사랑을 확인한 뒤 기쁨에 취해 부르는 아리아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많은 표정이 담긴 얼굴로 소화해낸 레치타티보는 관객을 가면무도회 속으로 깊이 빨려들게 만들었다. 소프라노 임세경은 2막과 3막에 걸쳐 고난도 아리아 여러 곡을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특히 3막에서 남편 레나토에게 죽음을 종용당할 때 마지막으로 한 번만 아들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하는 아리아는 눈물샘을 자극했다. 고음으로 올라갈수록 풍성해지는 성량에 압도된 객석에서는 여러 번 숨 고르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울림으로 극의 중심을 잡은 건 레나토 역의 바리톤 고성현.특히 3막에서 아내를 탐한 왕 리카르도에 대한 복수를 결심하며 '그 영혼을 더럽힌 건 바로 너'를 부를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바리톤이라는 찬사를 실감케 했다. 분노에 찬 모습을 연기하는 손짓과 표정,동작 하나까지 노련미가 묻어났다.
점쟁이 울리카 역의 메조 소프라노 이아경은 음산한 무대 배경에 맞아떨어지는 중저음의 매력을 발산했다. 깃털처럼 맑고 기교 넘치는 목소리의 시종 오스카 역을 맡은 정시영은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기교를 훌륭하게 소화하며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는 2008년 라 스칼라 극장에서 모차르트 '피가로의 결혼'의 수잔나 역으로 데뷔한 다음해부터 이 극장에서 올려지는 작품들의 주역으로 활동해왔다. 의상은 붉은 색으로 톤만 다양하게 변화시킨 모던한 디자인이 주로 쓰였다. 등장인물의 심리상태를 반영하듯 복수심에 불타게 될 레나토는 1막부터 채도 높은 붉은 색을 입었다. 리카르도는 다소 차분한 이미지의 짙은 붉은 색을,아멜리에는 이 둘 중 누구와도 하나가 될 수 없는 운명을 암시하듯 보색인 녹색 의상을 주로 입었다.
오페라 극장의 첫 번째 매력인 '극적 장관'을 만들어내지 못한 무대는 아쉬운 점으로 남았다. 무대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여러 해외 버전들에 비해 무대 전환도,화려한 거울 속 무도회 장면도 없었다. "모던함이 전 세계 오페라의 추세라고 해도 볼거리마저 없애선 안 된다"는 게 이날 관객의 반응이었다. 오페라 '가면무도회'는 16일까지 계속된다. (02)580-1300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