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여인의 기묘한 자세에 쏟아진 차가운 독설…울보 화가는 지금도 울고 있을까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

"척추뼈가 2~3개는 더 많다"…"해부학 ABC 모르는 무식쟁이"
1819년엔 혹평 쏟아졌지만…

'페르시안 블루' 차가운 색조…왜곡된 신체의 '눈부신 미학'
오늘도 루브르박물관엔 이 신비로운 여인 향한 긴 줄이…

신고전주의 화가 앵그르(1780~1867)는 세상에 둘도 없는 울보였다. 제자 아모리-뒤발이 '앵그르의 아틀리에'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는 그림이 마음대로 되지 않으면 물감 나이프로 캔버스를 북북 긁어내곤 했다. 데생의 경우도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곧바로 휴지통에 던져넣었다. 그럴 때마다 그의 눈엔 굵은 눈물방울이 가득 맺혔다. 맘 좋은 그의 부인은 그때마다 남편을 어린아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으며 도닥거려줬다.

이런 앵그르의 성격은 예술가들 사이에서 흔하게 발견되는 정서적 특징이다. 감성을 먹고사는 예술가가 아니던가. 그들은 자그마한 일에도 펄쩍 뛰며 기뻐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을 가지고 누구보다 더 슬퍼한다. 그 예측불허의 감정적 널뛰기는 보통사람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감정에의 몰입이야말로 보통 사람이 상투적인 일상에서 보지 못하는 새로운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힘이다. 조바심 내고 질질 짜는 앵그르의 성격은 선천적인 부분도 있지만 모진 인생의 풍파를 겪으면서 후천적으로 형성된 것이기도 했다. 앵그르는 말년의 성공이 있기까지 수많은 비평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자신의 분노를 주체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그 자신 그래봬도 로마대상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신인 화가가 아니던가. 비평가들의 비꼬인 독설은 그의 자존심을 산산조각 냈다. 그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는 아모리-뒤발이 저술한 방대한 책자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앵그르는 스승인 자크 루이 다비드와 함께 18세기 말부터 19세기 전반에 걸쳐 유행한 신고전주의 진영을 대표하는 화가였다.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퇴폐적인 로코코 양식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신고전주의는 엄격한 고전적 규칙의 부활을 지향했다. 그는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데생으로,그것은 단순히 선(線)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성과 구성,입체감을 포괄한다고 주장하면서 색채는 부차적인 것으로 봤다. 그는 그런 특성이 르네상스의 대가인 라파엘로의 그림에 가장 잘 구현돼 있다고 봤다.

그는 공공연히 르네상스의 수호자로 자처한 보수주의자였고,그 점은 당시 신고전주의 진영을 위협하던 낭만주의를 극단적으로 혐오한 데서 잘 드러나 있다. 반감이 어찌나 심했던지 제자 중 조금이라도 낭만주의의 문턱을 기웃거리는 자가 있으면 가차없이 싹을 도려냈다. 그러나 그런 낭만 기피증에도 불구하고 후대 비평가와 예술가들은 앵그르를 신고전주의자인 동시에 낭만주의자로 본다. 참으로 기막힌 아이러니다. 앵그르의 작품은 기법상으로는 고전주의에 발을 딛고 있지만 내용상으로는 낭만주의적 요소가 강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는 당대에 유행한 오리엔탈리즘,즉 동방 세계에 대한 탐구 분위기에 적극 동참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페르시아 세계를 상상력을 동원해 표현했다. 이국 취미와 상상력은 낭만주의가 등을 기대는 주요한 특징들이라는 점에서 그를 낭만주의자로 보는 것은 결코 틀린 견해가 아니다. 더구나 그가 몰입한 주제는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페르시아의 성적 판타지의 세계로 낭만주의자들의 단골 메뉴였다.

같은 신고전주의자들은 그를 사이비 고전주의자라고 비아냥댔지만 들라크루아 등 낭만주의자들이 찬사를 아끼지 않은 것만 봐도 그의 낭만적 성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는 그런 낭만 정신이 반영된 대표작의 하나로 나폴레옹의 누이 캐럴린 뮈라가 주문한 것이다. 페르시아 왕의 첩실을 모델로 한 듯한 이 작품은 커튼과 침대보 등에 나타난 것처럼 전반적으로 청색 톤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페르시아는 오래전부터 청색 안료인 회청(回靑)의 산지로 유명했다. 이는 작품에 진한 페르시아풍의 이국 정서를 풍기게 하는 중요한 매개체 역할을 하고 있다. 기다란 담뱃대와 공작 깃털로 만든 부채 역시 이국적인 분위기를 돋우는 데 한몫하고 있다. 이 작품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신체를 기형적으로 늘어뜨린 누드의 여인이었다. 1819년 이 작품이 살롱전에 출품되자 비평가들은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독설을 쏟아냈다. 비평의 초점은 여인의 몸이 정상인보다 길어 기형적이며 따라서 이 작품은 해부학의 A,B,C도 모르는 무식쟁이 화가의 작품이라는 점이었다. 어떤 비평가는 이 여인의 척추뼈가 정상인보다 2,3개 많다고 주장했고(최근 연구 결과로는 5개) 또 다른 비평가는 여인의 왼쪽 팔이 오른쪽보다 짧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색의 차가운 색조,신체의 왜곡은 아름다운 이상미만 장려한 관제 아카데미에 대한 반감을 드러낸 것으로 작품의 이국정서를 더욱 강화시킨다. 그렇지만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평가들의 악의적인 비평과 몰이해에 앵그르는 또다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울보화가의 상상력이 빗어낸 여체는 참으로 눈부시다. 오늘도 루브르박물관에는 기다란 허리의 신비로운 여인을 만나기 위한 미술 애호가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그것은 작가가 오랜 눈물의 세월 속에서 쌓은 금자탑이다. 눈물은 예술을 떠받치는 가장 큰 힘의 하나라는 점을 앵그르는 확실히 입증한다.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결코 남을 울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림스키코르사코프의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

음악에서 동방에 대한 관심은 미술과 마찬가지로 낭만주의의 움직임 속에서 싹텄다. 음악가들에게도 동방의 세계는 이국정서를 충족시키는 낭만의 샘물이요 중요한 창작의 원천이었다.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베르디의 '아이다'와 중국을 무대로 한 푸치니의 '투란도트'는 그런 낭만정신을 바탕으로 한 오페라 걸작이다.

보다 적극적인 관심은 낭만파의 연장인 러시아 국민음악파에 의해 이뤄졌다.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러시아는 국민음악파 작곡가들의 지역 전통에 대한 관심과 함께 중앙아시아 및 옛 페르시아를 테마로 한 표제음악들이 만들어졌는데 림스키코르사코프(1844~1908)의 교향모음곡 '세헤라자데'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결혼한 신부와 첫날밤을 지낸 후 그들을 모조리 참수한 고대 페르시아의 포악한 왕 샤리아르를 1001일 동안 기이한 이야기로 사로잡아 처형을 면한 지혜로운 왕비 세헤라자데의 이야기를 테마로 한 이 표제음악은 신비로운 동방세계의 분위기를 감미로운 관현악 선율에 담았다. 곡 중에서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거칠고 위압적인 금관 연주는 포악한 왕,애조 띤 바이올린과 하프 선율은 세헤라자데를 묘사한 것이다.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상상하면서 고대 페르시아 궁정의 잠 못 이루던 밤을 떠올려 보자.


정석범 문화전문기자ㆍ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