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10월…한국, 갈림길에 서다

발목잡힌 한·미 FTA…경제도약 차질
서울시장 보선 '정당 정치' 운명 걸려
'Occupy 서울' 이념전쟁 촉발할 우려

대한민국이 갈림길에 섰다. 남은 10월 2주 동안 예정돼 있는 세 가지 현안이 어떻게 풀리느냐에 따라 한국의 진로는 달라질 수 있다. 15일 열릴 예정인 '점령 시위(Occupy 서울)'와 26일의 재 · 보선,28일로 예상되는 한 · 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 처리가 그것이다. '점령 시위'는 양극화 흐름을 틈타 이념적 편향성이 강해지는 사회 흐름을 대변한다. 재 · 보선은 내년 총선과 대선을 가늠하는 정치 풍향계다. FTA 비준안 처리는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 경제의 경쟁력과 직결돼 있다.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미래를 가늠하는 상징적 사안들이다. 하나같이 보수와 진보 가치는 물론 한국의 진로가 걸린 문제다. 그 결과를 숨죽이고 지켜보는 이유다.

무엇보다 FTA는 개방으로 일어선 한국 경제에 절호의 기회다. 한 · 유럽연합(EU) FTA에 이어 한 · 미 FTA가 발효되면 이명박 대통령이 말한 대로 '미국이 가진 시장보다 더 큰 시장'을 확보할 수 있다. 미국,유럽과 동시에 FTA를 체결한 나라는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우리 경제가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14일 "한 · 미 FTA로 인해 일본의 대미 수출이 불리해지는 상황"이라며 "엔고로 가뜩이나 일본 자동차의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는데 한 · 미 FTA까지 발효되면 시장 점유율을 만회하기 어렵다"고 우려할 정도다.

마잉주 대만 총통도 이날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 · 미 FTA가 대만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할 것으로 보이며,특히 전통산업 부문은 큰 타격이 예상된다"고 말했다. 자동차 반도체 등을 놓고 일본 중국 대만 등과 명운을 건 승부를 펼치고 있는 한국에 미국과의 FTA는 흘려버릴 수 없는 절호의 기회다.

이런 호기를 살리기는 커녕 국내 정치는 거꾸로 가고 있다. 미국 의회가 비준안을 처리함에 따라 '공'은 우리 국회로 넘어왔지만,조기 처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민주당 등 야권의 반대가 누그러지지 않고 있어서다. 여야는 이날도 '여야정협의체'를 열어 의견 접근을 시도했으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민주당은 당초 재재협상안으로 제시한 '10+2'안에 대한 정부의 대책을 요구하며 한발짝도 물러서지 않았다. 국회 지식경제위는 이날 전체회의를 열어 디자인보호법과 상표법,특허법 등 FTA 관련 7개 부수법안 상정을 논의할 예정이었으나 야당이 회의를 보이콧,불발됐다. '4류 정치'가 FTA처리 태클…연내 통과 물 건너갈 수도
야권, 연대 집착해 "비준 반대"…여당은 농민票 의식해 몸사려

여야가 타협을 시도하고 있지만 전망은 밝지 않다. 비준안 처리에 정략이 담겨 있어서다. 민주당은 비준안 처리 반대를 고리로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과 내년 양대 선거에서 '야권 연대'를 추진하고 있다. 비준안 반대가 야권 연대의 '필요충분조건'인 셈이다. 시간을 갖고 타협해도 최종적인 합의에 이르기 어려운 이유다. 역설적으로 비준안은 여당에 의한 강행 처리가 불가피하다는 의미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한나라당은 좌고우면하고 있다. 과반 의석을 보유한 만큼 마음만 먹으면 처리할 수 있지만,내년 선거를 앞두고 농민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좌파 시민단체의 대대적인 반대운동도 정치적 부담이다. 결국 한나라당은 10월을 넘겨 "협상을 할 만큼 했다"는 명분을 쌓은 뒤 11월 중 단독 처리하는 수순을 밟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비준안을 어렵사리 처리한다 해도 나머지 14개 부수법안을 연내에 처리하기는 쉽지 않다. 법안이 몇 개 상임위로 분산돼 있어 야당이 제동을 걸면 난항이 불가피하다. 연내 처리가 물건너갈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 고위 당국자조차 "내년 2월이나 돼야 법안 처리가 완료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번 재ㆍ보선 결과도 정치권에 격변을 몰고올 것으로 전망된다. 선거에서 패한 정당은 지도부 책임론에 휩싸이고,조기 당권 경쟁으로 이어질 개연성도 다분하다. 이보다 더 큰 변화는 정치구도 자체가 격랑에 빠져들 수 있다는 점이다. 그 중심에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가 있다.

시민운동가 출신인 박 후보가 나경원 한나라당 후보를 제치고 서울시장에 당선되면 정당정치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게 분명하다. 시민단체가 중심인 제3의 정치세력화에 가속도가 붙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진보 색깔이 강한 시민단체가 정치의 중심에 선다는 것은 보수세력의 위기를 의미한다. 진보진영이 득세하면서 이념 대결이 한층 가열될 수 있다. 내년 총선과 대선도 전혀 다른 구도에서 치러질 가능성이 없지 않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주도하는 시민단체 중심의 정치세력이 전면에 등장한다면 여야 의원들 중 상당수가 이탈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정치권의 시선이 온통 재ㆍ보궐선거에 쏠려 있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15일 서울 도심에서 열리는 '점령 시위'는 순수성을 잃은 이념 집회로 변모하면서 또 다른 포퓰리즘을 낳는 게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1%의 자성'을 촉구하며 전 세계로 번져나간 시위는 한국에서는 이념단체들의 개입으로 정치집회로 변질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한ㆍ미 FTA 비준 반대와 무상보육 실행,한ㆍ미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등 정치구호가 전면에 등장한 게 단적인 예다. 좌파 단체들이 시위를 주도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자발적인 외국의 시위와 달리 이념단체들이 주도하는 이 같은 시위에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를 유도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 많지만,걱정은 그 이후다. 사회 양극화로 어려워진 서민들을 이념 투쟁에 동원할 경우 계층 간 대립으로 비화할 수 있어서다. 정부의 한 고위 당국자는 "앞으로 시위대가 어느 곳으로 향할지 몰라 파장을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이재창 정치부장 lee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