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여록] 월가 시위에서 나눈 대화
입력
수정
유창재 뉴욕특파원 yoocool@hankyung.com16일 뉴욕 월스트리트 인근 주코티 공원을 '점령'한 수백명의 시위대 중 벤 호건이라는 24살의 청년이 눈에 띈 건,그가 특이한 성조기를 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조기에는 미국의 50개 주를 뜻하는 50개의 별 대신 엑슨모빌,GM 등 제조업체부터 뉴스코퍼레이션,구글 등 미디어 업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을 대표하는 미국 대기업들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다. 의미를 묻자 "대기업들의 권력이 점점 더 세져 이제는 미국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을 꼬집기 위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커뮤니티컬리지(2년제 지역 전문대학)를 졸업하고 식당 웨이터로 일한다는 이 청년과 대화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기업들이 돈을 벌어야 투자를 하고,그래야 일자리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호건은 "분명히 맞는 말"이라고 했다. 그는 "하지만 대기업들은 매일 매일 우리의 지갑에서 돈을 뺏어가고 있고,그들이 신경쓰는 것은 오로지 이익뿐"이라며 "도로에서부터 심지어 감옥까지 민영화되고 있는 건 그래서 무서운 일"이라고 말했다. 이때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대화를 듣던 한 러시아인이 끼어들었다. 모스크바에서 출장 온 알렉스라고 자신을 소개한 러시아인은 "러시아는 정부가 모든 걸 국유화하고 있는데,미국도 그래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호건은 "적어도 정부는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국민을 대변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알렉스는 말 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리곤 "월가 시위를 '아랍의 봄'에 비유하던데,중동과 아프리카는 독재와 가난에 시달렸고 미국은 다르지 않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호건은 "우리는 어릴 때부터 '아메리칸 드림'에 대해 듣고 자랐다"며 "아메리칸 드림은 죽었고,기대가 높았던 만큼 절망감도 크다"고 답했다. 알렉스는 다시 한번 어깨를 으쓱했다.
대화는 그렇게 끝났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는 알렉스를 따라가 '월가 시위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다양한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것이 부럽다"고 했다. 그의 눈에는 자신들이 누리는 자유와 번영이 그들이 부정하는 자유시장 경제와 그 안에서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기업들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모르는,어쩌면 알 필요도 없는 이 순진한 미국 젊은이들이 못내 부러워 보이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