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뷰] 정치적 통합 재촉하는 유럽위기

단일통화 도입 때부터 혼란 예견…돈 쏟아부어도 유로존 탈퇴 없어
각국 재정 미세조율 계기될 것

박병관 < 獨 알리안츠그룹 영업전략그룹장 >
필자는 5년 넘게 독일에서 근무하던 중 유로화가 위기에 처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유로화로 급여를 받고 세금을 내고 또 생활해야 하는 필자에게도 유로화 위기는 남의 일만은 아니다. 그러면서 유로화를 둘러싼 논쟁들 중에 외부인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의아한 부분들이 있다.

먼저 애초부터 어떻게 유럽의 통합이 이토록 경제적 현실을 무시하고 진행될 수 있었던가 하는 점이다. 화폐통합은 참여한 모든 국가들에게 동일한 환율과 금리가 적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각국 고유의 거시경제적 충격을 흡수할 수 있는 정책적 수단이 없어졌다는 뜻이다. 이로 인해 시장에서 발생한 충격을 통화 및 환율정책을 통해 극복할 수 없기 때문에 불균형이 심화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과연 과거 유럽통합을 추진했던 지도자들이 이렇게 분명한 경제적 문제도 예견하지 못했단 말인가?정작 더 의아스러운 건 유로화로 인한 극심한 혼란에도 불구하고 유로화가 유럽에서 단일통화가 돼야 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2년여 가까이 그리스 아일랜드 등 유로화 통용 국가들의 재정위기가 지속됐지만 유로존을 탈퇴하겠다는 국가는 없었다. 물론 일부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문제가 되는 일부 국가를 탈퇴시켜 일방적인 재정지원에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는 의견이 종종 제시됐다. 그러나 이는 일부의 의견일 뿐 유럽의 다수는 아직도 공용통화인 유로를 폐기할 생각이 없다. 심지어 자체적인 환율 및 재정정책을 시행하지 못해 지독한 경기침체를 겪고 있는 그리스조차 유로존을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한다.

최근 요시카 피셔 전 독일 외무장관이 한 일간지를 통해 메르켈 독일 총리에게 더욱 단호하게 유로화를 사수하라는 공개서한을 보낸 적이 있다. 유로화는 유럽통합의 상징이며 전후(戰後) 유럽이 이룩한 위대한 업적으로,금전적 득실로 계산할 수 없는 가치를 가진다는 것이었다. 독일 국민의 다수도 재정 지원에 대해 분노는 하고 있지만,그렇다고 유로화를 포기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2차 세계대전 후 유럽의 지도자들은 미래의 평화와 번영이 민족주의를 극복하는 통합에 있다고 믿었다. 이들은 시장과 경제의 통합이 궁극적으로 정치적 통합을 이루는 동인이 될 것으로 여겼다. 최근의 위기상황들은 유럽통합을 준비할 당시 상당부분 예견됐을 것이다. 예를 들어 1999년 단일통화 도입을 앞두고는 경제위기를 경고하는 목소리들이 분명히 있었다. 과거 유럽의 지도자들은 국제금융시장이 이렇게 성장할지,그리고 각국 금융시장 간 위기의 전이가 이렇게 심각하게 발생할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단일통화의 도입이 정치적 통합에 되돌릴 수 없는 압력이 되리라는 확신이 있었다. 혹 통화위기가 발생한다면 그만큼 통합에 대한 압력이 유럽사회에서 더욱 거세지리라 생각했고,이를 다분히 의도했을 것이다.

이제 유럽은 기로에 놓여 있다. 유로화의 장기적 안정을 위해 남부국가들에 유동성을 지원하는 일만큼 중요한 것은 통합유럽이 구조개혁의 의지를 시장에 납득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개혁은 단순히 재정지출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유럽 각국의 재정을 보다 세밀하게 조율함으로써 정치적 통합에 한발 더 다가가야 하는 것이다. 즉 각국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국가적 자율성을 지금보다 더 많이 포기해야 한다. 전후 유럽의 지도자들은 통합 유럽에 미래와 세계의 평화가 달려있다고 보았고,경제통합과 단일통화의 도입이 정치적 통합을 추진할 강력한 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었다. 유럽통합의 지도자들이 가졌던 이 신념이 실현되지 못한다면,이는 비단 유럽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슬픈 일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