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나도 술 한잔 할 수 있는 게 한국인들의 강점"

한경과 맛있는 만남 - 마틴 유든 영국대사

3차례 10년 이상 근무 '한국통'…빈대떡·만두·김치찌개 즐겨
11월에 한국 떠나면 첫 데이트 했던 돌담길 그리울 것

젓가락을 들더니 능숙하게 파래전을 집어 들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보다 젓가락을 더 잘 사용하는 것 같다고 했더니 "요즘 젊은 사람 중에는 젓가락질을 이상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예전에 어른들이 가르쳐준 대로 엄지와 검지 그리고 중지를 주로 써서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젓가락질도 흐트러짐 없이 원칙을 지키는 모습은 전형적인 영국사람인데,된장에 무친 시래기를 맛있게 먹는 것은 영락없는 한국사람 같았다.

마틴 유든 주한 영국대사(56)는 '반(半)영국 반(半)한국'사람이라 불릴 만하다. 현재 서울에서 활동 중인 외교관 중 그만한 '한국통'을 찾기도 힘들다. 한국어로 대화가 가능한 외교관은 의외로 많지 않다. 1978년 이등서기관으로 서울에 처음 발을 디딘 후 세 차례에 걸쳐 10년 넘게 한국에서 활동했다. 2003년에는 영국에서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Times Past in Korea)'이란 책도 펴냈다. 유든 대사에게 단골집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니 정동 영국대사관 앞 퓨전 한정식집 '달개비'를 선택했다. 11월 이임 날이 다가와서 그런 걸까. 말할 때마다 정동 영국대사관과 그 인근 지역에 굉장한 애정을 갖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에게 정동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전 세계에 산적한 문제를 외교의 힘으로 풀어보고 싶다"며 '열정'에 가득찼던 23세 청년이 평생의 반려자(피오나 유든)와 만나 데이트를 즐긴 곳이 정동 덕수궁 돌담길이었다. 무용을 전공한 그의 아내가 공연을 위해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눈에 반해 데이트를 신청했고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달개비 식당 바로 옆에 위치한 성공회 교회당은 "한국을 떠났을 때 가장 생각이 많이 날 것 같은 곳"이다. 1978년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한국에서 일할 때는 일요일마다 빠지지 않고 갔었다. 식당 달개비 역시 "성공회 신부님과 자주 들르던 장소"다. 정동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보따리를 풀기 시작하자 교회당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퍼졌다. 유든 대사의 눈이 어린아이처럼 반짝였다.

그는 식성이 좋아 보였다. 입맛돋움용으로 가장 먼저 나온 흑임자죽을 깨끗이 비우더니 얇게 썬 네모 모양의 무가 둥둥 떠 있는 물김치 국물로 숟가락을 옮겼다. 매콤한 국물을 연신 숟가락으로 떠서 꿀꺽 삼켰다. 유든 대사는 "이름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향이 좀 심하게 나서' 다른 영국인들은 어려워하는 콩으로 만든 장(청국장)도 잘 먹는다"고 말했다. 함께 대사관에서 일하던 요리사가 은퇴했을 때 본인이 강력하게 주장해서 한국인 요리사를 후임으로 뽑았다고 했다. 덕분에 한국 음식을 전보다 더 많이 접할 수 있게 돼 만족스럽단다. 그렇다고 고급 요리만 찾는 건 아니다. "음식을 가리는 편은 아닙니다. 비빔밥을 특히 좋아하는 편이고요. 빈대떡과 만두도 잘 먹습니다. 김치찌개도 물론 즐깁니다. 몇 천원 가격에 싸게 즐길 수 있는 음식들을 먹는 것도 좋아합니다. " 그는 3000원이나 4000원 정도의 값에 그런 맛을 즐길 수 있다는 건 행운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에게 있어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궁금했다. '꿈의 부임지'라는 데 아내와 의견이 일치했다고 했다. 한국사람들은 꾸밈이 없고 솔직해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고 그는 설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빨리 사귈 수 있다는 게 일본이나 중국과는 다르다고 덧붙였다. "중국이나 일본에선 첫 만남이 매우 형식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명함을 교환하고 날씨 얘기 같은 겉도는 얘기만 주로 합니다. 하지만 한국은 첫 만남부터 비즈니스 얘기로 바로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농담을 나눌 수도 있고 만난 첫날 바로 술 한 잔 같이 할 수도 있지요. " 그는 한국 정부부처나 대기업에 유능한 사람들이 참 많고 그들은 또 일처리가 깐깐하다고 평가했다.

한국사람들을 칭찬하는 도중에 입맛을 돋우는 파래전이 나오자 얼른 젓가락으로 하나를 집는다. 서양사람들은 본래 해초를 잘 안 먹지만 유든 대사는 맛있게 한입 베어 물었다. 고소하면서도 쌉싸름한 파래 맛 때문에 갑자기 생각난 것일까. 그는 "사람들의 능력이 더 발휘될 수 있어야 하는데 정부부처 간 협력이라고 할까 혹은 정보공유라고 할까 하는 부분에선 문제가 있어 보인다"고 쓴소리를 했다. 어떤 정보는 다른 부서에 전달이 안 된 경우도 있고,어떤 정책은 부처에 따라 입장이 다르다는 것.그래서 정책결정 과정이 복잡해지고 결론을 내리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꼬집었다.

하지만 한번 결정을 내리면 한국사람들은 정말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경쟁력이 유지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한국사람들에게서 보이는 미래에 대한 자신감은 이래서 생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위협을 해도,내일 당장 증시가 폭락할 것이란 분위기가 퍼져도 한국사람들은 항상 자신만만하다"는 게 인상적이다. 그런 특성을 가진 한국사람으로 친한 친구는 한승수 전 총리와 양성철 전 주미대사,한나라당 박진 의원 등을 꼽았다. 한 전 총리와는 1970년대부터 알고 지낸 오랜 벗이다. 사람뿐만 아니라 서울과 한국의 이곳저곳에 추억이 많다고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아내와 처음 만나 데이트를 즐겼던 덕수궁 돌담길.아내와 아침식사를 하던 조선호텔의 식당 '나인스 게이트'도 평생 잊을 수 없는 곳으로 꼽았다. 한국에 대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것은 뜻밖에도 1979년에 본 종묘대제.당시 종묘대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지금처럼 대단하지 않았지만 정말로 웅장한 행사였고 그때부터 한국의 '속 깊은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났다. 그가 경주 석굴암을 자주 찾았던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1970년대에는 유리로 막혀 있지 않아서 본존불 앞에서 직접 감상할 수 있었죠.아~ 정말로 환상적인 유적입니다. "

한국의 발전 과정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으로서 소회도 많을 듯싶었다. 대의정치를 가장 먼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서 특히 경제 발전 속도를 못 따라가는 정치에 대해선 어떤 느낌을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는 "민주주의 발전 과정에서 흠 없이 완벽한 나라는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며 "정치 발전과 경제 발전은 매우 복잡하게 진행되는데 전반적으로 한국은 경제 발전뿐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도 모범적으로 진행된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고 외교관다운(?) 답변을 내놨다.

◆ 내년 여왕 즉위 60년 · 런던올림픽…'그레이트 캠페인' 시작식당 바로 옆 덕수궁 정문에서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데도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되물었더니 "그건 한국과 유럽연합(EU)의 FTA가 아니라 미국과의 FTA 아니냐"는 농담으로 되받았다. 그러면서 "일각에서 한국 정치권이 최근의 사회적 욕구 표출에 대응하는 데 있어 소극적이라는 지적을 접하긴 한다"며 조심스럽게 한국 정치권의 분발을 촉구했다.

통통한 대하구이가 나오자 익숙한 솜씨로 껍질을 벗기는 그에게 북한에 갔던 경험을 들려달라고 하자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아마도 곤궁한 북한 사람들의 삶이 생각난 듯했다. "세 번 가봤는데 북한 주민들은 '선택'이란 것을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며 "경제적으로도 매우 궁핍한데 남북한이 같은 민족이고 같은 잠재력을 지녔지만 정부가 다른 탓에 그처럼 차이가 나는 것을 보면 무척 슬프다"고 말했다.

한국과 영국 간 교류가 최근 부쩍 늘어나 보람을 느낀다는 그는 "한국에 처음 왔을 때는 윤보선 전 대통령이나 한 전 총리,그리고 김상만 전 동아일보 회장 등 영국에서 공부한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은 수천명이 영국에서 유학 중이고,영국에 사는 한국인이 5만명에 달한다. 영국에서도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이 늘고 있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맨체스터유나이티드뿐 아니라 울버햄프턴,볼턴 같은 축구팀에 익숙해질 정도로 양국이 가까워졌다고 설명했다.

영국 정부는 최근 국가 이미지 개선을 위해 '그레이트 캠페인(Great Campaign)'을 시작했다. 내년은 런던올림픽이 열릴 뿐 아니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즉위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는 "영국에 대해선 제국주의라든가 나쁜 날씨,그리고 안개 같은 부정적 이미지가 있는 것도 사실"이라며 "제인 오스틴이나 찰스 디킨스,그리고 윌리엄 셰익스피어 같은 옛 작가들의 명성이 긍정적 이미지를 만들긴 하지만 그것이 재규어 자동차나 위스키를 사도록 만들지는 않는다"고 지적했다. 또 "관광산업에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현대적인 연구·개발(R&D)센터를 유치하는 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복제양 돌리의 고장이 영국이라는 점을 알리는 등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국가 차원에서 힘을 기울이고 있는 만큼 한국과 영국 간 교류가 앞으로 더 늘어나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유든 대사는 "경제적 분야에서도 교류가 활발해지고 있는데 특히 양국은 녹색산업과 저탄소산업 분야에서 강점이 있고 협력할 사업도 많다"며 "풍력발전,조력발전,재생에너지 분야에서도 양국 간 시너지 효과가 클 것으로 보이는 만큼 한국 기업들이 영국에 투자를 늘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국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 음식의 맛을 좋게 하는 것도 포함되느냐고 농담을 건넸더니 "영국의 대중적 식사인 피시 앤드 칩스(생선튀김과 감자튀김)는 좋은 음식이지만 한식과는 미감의 차이가 큰 것 같다"고 정색을 하고 답했다. 그는 케이크와 홍차를 즐기는 영국의 애프터눈티 문화나 다양한 디저트 문화에 대해 한국 젊은층이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개인적으로는 영국의 위스키도 자랑거리라며 저녁 먹고 한잔 마시는 것을 즐긴다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인이 즐기는) 폭탄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한국을 떠나면서 한국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한국은 개방경제이고 외부 영향을 많이 받는데 안정을 중시하기보다는 개방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했다.◆ 마틴 유든의 단골집 - 달개비
자연 그대로 길러진 식재료로 한국 전통요리 재현…'점심상차림' 인기

서울 정동 영국 대사관 앞에 있는 '달개비'는 자연재료를 활용해 한국 전통요리를 재현해낸 업체다. 자연재료는 농약과 비료를 쓰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땅에서 기른 식재료를 일컫는다.

고객들에게 "맨홀 뚜껑에서 꽃을 피울 만큼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풀인 달개비의 생명력을 전해주고 싶다"는 의미에서 한식당 이름을 정했다.

매일 자연재배 전문 재료공급 업체 및 경동시장 등에서 재료를 구입해 식단을 짠다. 식당의 메뉴도 그때 그때 달라진다. 각종 계절나물을 활용하고 해산물은 살아있는 재료를 쓰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어머니의 정성과 손맛을 재현한다"는 원칙에 따라 주방에서 음식을 만드는 전문인력 13명은 전원 여성으로 구성돼 있다.

점심 메뉴로는 속이 부담스럽지 않게 적당한 양으로 요리들이 제공되는 '점심상차림'이 인기다. 죽과 물김치,샐러드,계절전,새우구이가 차례대로 나온 뒤 된장과 조기 반찬이 곁들여진 식사가 나온다. 가격은 4만원.점심과 저녁 모두 4만원,5만5000원,7만원의 세 가지 메뉴가 있다. (02)763-3434▷1955년 영국 런던 출생 ▷1977년 런던대 법학과 졸업▷1978~1981년 주한 영국대사관 이등서기관▷1994~1997년 주한 영국대사관 정치참사관▷1998~2002년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영국 외무부 무역투자본부 근무▷2003년 '한국에서 보낸 시간들'출간▷2003~2007년 미국 샌프란시스코 총영사▷2008~2011년 주한 영국대사관 대사

김동욱/전설리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