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속의 선율] 황제는 스스로 '冠'을 썼을까…그림 솜씨 능가하는 처세술로 절대권력자의 마음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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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루이 다비드의 '나폴레옹 대관식'프랑스 화가 가운데 자크 루이 다비드(1748~1825)만큼 오랫동안 권력의 핵심에 머문 인물도 드물다. 루이 16세 시절에 궁정화가,혁명기엔 국민화가,나폴레옹 집정기와 황제 시절에는 궁정의 수석화가로 30여년을 달콤한 권력의 그늘에서 보냈다. 왕정과 공화정이 교체하는 격동의 세월 속에서도 낙마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권력의 향배를 사전에 간파하고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꾀한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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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성향은 젊은 시절의 시련 속에서 배양된 것이다. 그는 일류화가가 되기 위한 등용문인 로마대상에 도전,세계의 수도인 로마에 입성하겠다는 야망을 품었다. 그러나 상황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로마대상은 실력만으로 가능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상을 주관한 로열아카데미의 권력 구도에 따라 수상자가 결정되는 게 다반사였다. 그는 세 번이나 미역국을 마시고는 자살까지 결심한다. 1774년 마음을 추스르고 네 번째 도전했을 때 서광이 비쳤다. 자신의 스승인 조제프 마리 비앙이 마침 로마의 프랑스아카데미 원장에 취임했던 것이다. 그해 로마대상이 그의 차지가 됐음은 물론이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 그는 정치 감각에 눈뜬다.
로마에 머무르며 그리스,로마의 명품들을 경험한 다비드는 당시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고 있던 로코코 미술의 경박함에 반발,신고전주의를 제창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1783년 루이 16세로부터 로마사를 배경으로 한 역사화를 주문받는다.
고심 끝에 선택한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기원전 7세기 도시국가 로마와 이웃인 알바 사이에 벌어진 분쟁을 다룬 것으로 출정을 앞둔 로마의 호라티우스 3형제가 아버지 앞에서 필승의 결의를 다지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다. 형제의 누이는 알바 측 전사와 혼인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어서 국가의 대의를 위해 사돈과의 사적인 유대관계를 희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 작품이 공개되자 전 프랑스는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왕실을 비롯한 보수진영은 이를 왕에 대한 충성으로 받아들였고,진보진영은 대의를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공화제의 도덕적 가치를 실현한 작품이라고 찬양했다.
혁명이 무르익어 가면서 다비드는 혁명정신의 대변자로 떠받들어졌고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혁명의 상징적 이미지가 됐다. 그런 분위기 속에 그는 정치에도 발을 담가 국민의회 의원이 됐고 자신이 주군으로 섬기던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보내는 데 한몫 거든다. 예술에 관한 결정도 그가 좌우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측근이던 다비드는 공포정치에 반발한 보수파의 반격으로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하자 정치범으로 몰려 구금된다.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그를 구한 것은 이혼한 부인이었다. 그의 구명운동으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1799년 나폴레옹이 혁명정부를 무너뜨리고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하면서 그는 전제정권의 나팔수로 변신한다. 그것은 또 한번의 변절이었다. 1804년 황제에 등극한 나폴레옹은 다비드를 수석 궁정화가에 임명하고 그의 재능을 적극 활용한다. 나폴레옹은 먼저 자신의 대관식을 담은 네 폭의 기록화를 주문한다. 자신이 교황권에도 좌우되지 않는 명실공히 유럽 제국을 지배하는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다비드는 황제의 기대에 부응해 대관식이 거행됐던 노트르담 성당에 거처를 마련하고 실제 상황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3년 만에 완성한 '나폴레옹 대관식'은 의식의 신성함과 행사의 높은 품격이 잘 드러난 다비드의 걸작 중 하나다. 전통적으로 프랑스의 왕들은 랭스의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왔는데 나폴레옹이 노트르담을 선택한 것은 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차별성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다비드가 가장 고민한 것은 바로 그런 신권에 예속되지 않은 최고의 현세 권력자 나폴레옹을 화폭에 어떻게 구현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관을 쓰는 모습으로 묘사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신권을 모독하는 광경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결국 화가는 그 어색한 광경 대신 이미 관을 쓴 황제가 황후에게 관을 씌워주는 모습을 그림으로써 그런 난점을 비켜갔다. 교황도 황제의 뒤쪽에 일종의 하객처럼 배치하여 결코 황제권을 넘어설 수는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했다. 대관식의 품격은 참석자의 면면에서도 잘 드러난다. 아치 구조 내부의 특별관람석 아래층에는 황제의 어머니 마리아 레티자 라몰리노,황후의 왼쪽에는 황제의 처남으로 나폴리왕을 지낸 요아힘 뮈라,다시 그 왼쪽에는 황제의 누이들과 남동생들이 자리하고 있다. 원래 나폴레옹의 어머니와 동생 조제프는 대관식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나폴레옹의 요구로 삽입된 것이다.
정치적 실권자들의 모습도 눈에 띈다. 오른쪽의 관객을 향해 등을 돌린 네 사람은 제3집정을 지낸 샤를 프랑수아 르브룅,대법원장인 장 자크 레지스,국방장관을 지낸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르,시종장인 탈레랑이다. 다비드는 이 성스러운 의식의 목격자로서 자신의 모습을 특별관람석 위층에 보일듯 말듯 삽입했다.
200여명에 달하는 참석자들의 시선은 한결같이 나폴레옹이 조세핀에게 관을 씌워주는 중앙을 향해 있다. 이들 중 황제의 가족과 성직자들은 밝게 처리했고 나머지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크기가 작고 흐릿하게 묘사했다. 마치 나폴레옹을 주인공으로 한 살아있는 연극무대를 재현해 놓은 듯하다. 완성된 그림을 본 나폴레옹이 만족했음은 물론이다.
이 처세의 달인의 말년은 어땠을까. 다비드는 보기 좋게 낙마의 쓴잔을 든다. 1814년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 실패로 실각하면서 브뤼셀로 망명한 그는 그곳에서 불귀의 객이 됐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브뤼셀은 파리에 다비드 시신의 양도를 제의했다. 그러나 이 제의는 한 벨기에 장묘협회의 반대로 무산됐다. 변절자에 대한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나 보다.
◆ 명화와 함께 듣는 명곡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26번 '대관식'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의 피아노곡 중에서 19세기에 가장 많이 연주된 곡은 뭘까. 바로 피아노 협주곡 제26번 '대관식'이다. 이 곡은 원래 1788년 4월 작곡한 것이나 1790년 10월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거행된 레오폴트 2세(재위 1790~1792)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대관식에서 연주된 이후 '대관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애초에 대관식을 염두에 두고 작곡한 건 아니었다는 것이다.
3악장으로 이뤄진 이 곡은 화려하고 경쾌한 멜로디로 특징지어지는 전형적인 로코코 음악.황제의 대관식이라는 장엄한 의식을 연상케 할 만한 기품을 함께 지닌 작품이다.
제1악장 알레그로는 현악기의 경쾌함과 관악기의 장중함이 교차하는 서주에 이어 절도와 화려한 기교를 겸비한 피아노 선율이 오케스트라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전개된다. 2악장 라르게토는 한 템포 늦춘 감미로운 피아노와 현악기의 선율이 편안하게 이어진다.
피아노의 화려한 기교가 돋보이는 3악장 알레그레토는 대관식을 마친 황제의 위풍당당한 행진 장면을 연상케 하는 대목으로 대중적으로 귀에 익은 멜로디가 독자의 귀를 번쩍 뜨이게 할지도 모른다.
무소르크스키의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대관식 장면도 이 작품과 함께 감상할 만하다.
정석범 문화전문기자ㆍ미술사학박사 sukbum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