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상징' 진흙서 건져올린 自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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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국 씨 시집 '파묻힌 얼굴' 출간'몸이 근질근질하여 땅바닥으로 흘러내리는/진흙들//손바닥으로 눌러서는 죽지 않는/진흙들,손가락 사이로 빠져 달아나는 진흙들//내 팔에 안기고 다리에 붙어서 어디론가 그렇게 흘러가고 싶었던 진흙들//누가 손짓하여 부르지도 않았는데,자꾸만 이쪽으로 밀려오는 진흙들//무너지고 나서야/땅바닥에 닿는 진흙들'('진흙들-골목의 입구' 중)
중견 시인 오정국 씨(55 · 사진)가 다섯 번째 시집 《파묻힌 얼굴》(민음사)을 펴냈다. 본질에 가닿으려는 흔적을 담아낸 전작들처럼 그는 이번 시집에서 진흙이라는 소재를 통해 존재와 자아를 탐구한다. 그는 자서(自序)에서 '애당초 나의 것은 없었다. 풍경과 사물로부터 빌려온 문장이었다. 사방에서 들려오던 진흙의 울음소리는 허기에 지쳐 있었다. 찰나의 빛 속으로 타들어 가던 갈증들이었다. 내 시는 결국 존재의 결핍을 파먹던 '허기'였던가'라고 썼다.
진흙은 시집을 관통하는 지배적 이미지다.
시집은 '진흙을 빠져나오는 진흙처럼'이란 시로 문을 연다. 특히 3부 15편의 '진흙들' 연작시에는 시인의 깊은 사유가 녹아 있다. 문학평론가 고봉준 씨는 '진흙은 정의가 불가능한,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야생의 상징이며 원초적 생명력에서 일상적 비유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유와 감각을 포괄하는 일종의 추상체'라고 설명한다.
진흙은 다양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다. '홍역 앓듯 열에 들떠 들썩거리는/짐승,진흙들'처럼 생명체에 비유되고 '수만 번 태어나고 수만 번 죽어도/오 나의 정겨운 피붙이'처럼 영원 회귀를 나타내기도 한다.
이렇듯 그의 시들은 미처 완성되지 않은 진흙 상태를 통해 무형의 세계와 이름 붙일 수 없는 것들을 노래한다.
양준영 기자 tetriu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