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감 뚝 끊겨 6시면 칼퇴근…공단 앞에는 빈 트럭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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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점검/ 中企, 글로벌 불황 '직격탄'유럽 · 미국발 재정위기의 암운(暗雲)이 국내 중소기업에 불황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다. 재정위기로 인한 수출 감소→수주 · 출하 감소→재고 증가→돈맥경화→고용 불안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부도 · 파산기업이 속출한 외환위기 때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길고 깊은' 불황의 초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분위기다.
대금결제 연기…고의로 늦추기도
위기 감지한 은행, 무차별 자금 회수
서울 구로구에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A사는 최근 1개 생산라인의 가동을 멈췄다. 한창 호황일 때는 매일 늦게까지 라인을 풀가동해 돌릴 정도였지만 요즘은 일감이 떨어져 매일 오후 6시면 공장 불을 끄고 퇴근한다. 매출도 지난해 400억원에서 반토막난 상황이다. 이 회사 관계자는 "불황이 다가오면 발주 기업들이 안전한 기업으로 일감을 몰아주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요즘 상황이 딱 그렇다"며 "주문이 줄고 있어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날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불황의 전주곡은 금융 부문에서 조용히 퍼지고 있다. 돈이 없어 대금 결제 기간을 한 달씩 늦출 뿐 아니라 자금이 있어도 결제를 고의로 늦추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인천시 남동공단에서 기계부품업체를 운영하는 S사장은 "대기업의 경우 아직 상대적으로 자금여력이 넉넉해 결제를 늦추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다만 일부 중견기업들이 자금여력 확보를 위해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제를 늦추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귀띔했다.
은행 창구도 비슷한 상황이다. 경기 반월공단 소재 A은행의 한 지점장은 "운영자금이 필요한 기업들이 운전자금 대출을 요청하는 경우가 상반기보다 크게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B은행 시화공단 지점장은 "업력이 오래된 기업들은 여유자금이 있어 괜찮은 편이지만 매출이 10억원 미만인 영세기업들의 자금 요청이 많아져 바빠졌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1 · 2차 벤더들은 지금의 상황을 견딜 만한 내성을 갖고 있지만 3 · 4차 벤더 등 규모가 작은 기업들은 벼랑으로 내몰리고 있다는 얘기다.
IBK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중소기업의 자금사정지수(FBSI)는 2분기 101에서 4분기에 94로 떨어졌다. 100 이하면 자금사정이 나빠졌다고 생각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다고 보는 기업보다 많다는 뜻이다. 한 관계자는 "일각에서는 내년 초 각종 자금 관련 지수들이 계단식으로 뚝뚝 떨어지는 경기침체 양상을 보일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고 말했다.
업계는 금융권의 예상보다 휠씬 재빠르게 움직인다. 중소기업중앙회 관계자는 "통상 불경기가 예상되면 자금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 이런저런 명목으로 융자를 받는 경우가 늘어난다"며 "최근 이런 속사정을 얘기하는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은행 관계자는 "그런 수요가 전혀 없다고 부인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털어놨다. 은행들은 은행들대로 난리다. 일부 은행들은 기업들의 어려움을 외면한 채 연체율을 줄이기 위해 무차별적인 자금 회수에 나서고 있다. 불황에 앞서 기업이든 은행이든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불황의 한편에서는 인력난을 호소하는 목소리도 크다. 정작 일을 해야 할 현장에서는 인력이 없어 공장을 돌릴 수 없다는 하소연이다. 그래서 외국인 근로자 쿼터를 늘려달라는 요구가 많다. 외국인 근로자의 경우 올해 4만명의 쿼터가 배정됐으나 조기 소진됐다. 외국인 근로자를 쓰는 4만1341개 업체는 현재 1만1996명이 더 필요하다며 쿼터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송재희 중기중앙회 부회장은 "글로벌 재정위기로 인한 환율 급등락이라는 변수까지 겹치면서 중소업계에서는 올해 말이나 내년 초 정말 힘든 시기에 봉착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팽배해 있다"며 "자금 인력 환율 등 다방면에서 맞춤식 선제 대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수진/김병근/정소람 기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