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악마와 협상해야 할까?…직관 버리고 '비용ㆍ수익' 따져봐야

하버드 협상의 기술 / 로버트 누킨 지음 / 김세진 옮김 / 21세기북스 / 448쪽 / 1만6000원

협상 비용 부담된다면 대안 찾는 게 더 효율적
도덕·정의감 함정 빠져 실용적 판단 무시하면 낭패
1980년대 초반,컴퓨터 공룡들 간에 특허전쟁이 터졌다. 당시 세계 최대 컴퓨터 업체인 미국 IBM과 막강한 경쟁자 일본 후지쓰가 당사자였다. 쟁점은 후지쓰가 IBM 메인프레임의 운영체제 소프트웨어를 불법적으로 베꼈는가였다. 후지쓰가 IBM 호환 기종을 만들어 시장을 잠식하자 IBM이 자사 운영체제를 도둑질했다는 주장을 하고 나선 것.

두 회사는 곧 타협안에 서명했지만 1년도 안 돼 깨지고 말았다. IBM 측은 후지쓰의 특허 침해에 따른 보상과 소프트웨어 개발 중단을 요구했다. 후지쓰는 IBM이 후지쓰가 IBM 호환 기종을 판매하기 전까지는 운영체제 판권에 신경도 쓰지 않았고,일본 특허법은 운영체제 소프트웨어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며 맞받아쳤다. 무엇보다 IBM의 메인프레임은 시장점유율이 너무 높아 '사실상 표준'이라고 할 수 있다며 IBM 호환 가능 운영체제를 개발하고 유지할 권리를 주장했다. IBM과 후지쓰의 특허 전쟁은 스마트폰 시장을 놓고 삼성과 애플이 벌이는 싸움을 연상시킨다. 앞으로 삼성과 애플의 특허 싸움은 어떻게 전개될까. 법원 판결을 통해 어느 한 편이 시장을 다 차지하는 상황까지 갈까. 아니면 IBM과 후지쓰처럼 협상을 통해 타협할까.

《하버드 협상의 기술》은 분쟁에 말려들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이며 협상 전문가인 저자는 모두를 골치 아픈 상황에 빠뜨리는 상대를 '악마'로 규정하고 "항상 그렇지는 않지만 생각보다 자주 협상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역사 속에 등장했던 분쟁의 주인공들과 부부나 가족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사적인 분쟁까지 다양한 분쟁 사례를 소개한다. IBM과 후지쓰의 특허전쟁,2차대전 때 유대인 동포를 구하기 위해 나치와 협상했던 루돌프 카스트너, 히틀러와의 협상을 거부한 윈스턴 처칠 등이다. 결과는 각기 다르다. 카스트너처럼 신념을 갖고 한 협상을 통해 어느 정도 성과를 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반면 처칠처럼 끝까지 협상을 거부해 영웅이 된 인물도 있다. 모든 분쟁에서 협상이 능사는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나 상대해야 할 '악마'는 언제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다. 그들과 싸워 이기거나 공존 또는 이용하는 방법을 늘 염두에 둬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면 분쟁 상대와 정면 충돌하지 않고 현명하게 협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는 사소해 보이면서도 실용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먼저 예상 비용과 수익을 체계적으로 비교하라고 말한다. 분쟁 상대의 관심과 협상 비용을 고려하고 협상이 아닌 대안이 있는지 찾아보라는 것이다. 타협을 성사시킬 수 있는 큰 거래는 있는지,거래가 이뤄진다면 실행 가능성은 얼마나 되는지도 검토해야 한다고 말한다. 직관이나 부정확한 도덕적 주장에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대안을 평가할 때는 홀로 하지 말라고 조언한다. 감정적으로 관계가 적은 한 사람 이상의 타인에게 조언을 구해 상황이나 가치 판단을 할 때 빠질 수 있는 함정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협상을 위한 예측도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해야 할 일을 직관적으로 정해놓고,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를 찾는 위험을 예측을 통해 줄일 수 있다는 것.그러나 예측은 확고한 규칙이 아닌 단순 지침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저자는 또 남을 대표해 결정할 경우 정의감 때문에 실용적 판단을 무시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덧붙인다. 개인은 도덕적 직관에 의해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도 있지만,기업을 대신한 중역,국가를 대표하는 정치 지도자 등은 그렇지 않기 십상이란 판단에서다. 저자는 이와 관련,"대표자로서 행동해야 하는 개인은 대안적 행동 방침의 예상 결과를 합리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며 "비용 수익 분석이 협상에 유리함에도 개인의 도덕적 직관에 따라 전쟁을 결정하는 정치 지도자의 행동은 부적합하다"고 지적한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