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양극화? 중국인은 잘 살면 안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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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위기는 서구 몰락의 증거일 뿐, 개도국 중산층 급증…인류는 평준화월스트리트에 몰려든 청년들이 내건 구호의 요약판은 자본주의 철폐였다. 지난 주말 서울에서의 과격한 시위나 한 · 미 FTA 반대투쟁에 나선 세력 역시 반자본주의 반세계화 반양극화의 깃발을 흔들어댄다. 맞다! 세계 각국에서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은 물론 일본조차 이미 중산층의 국가는 아니다. 일본의 지니계수는 복지지출을 제외하면 이미 0.5를 넘었다. 1억 중산층의 시대는 20년 전의 기억이다. 한국은 0.3으로 아직은 양호하지만 점차 악화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래서 바보들은 말한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양극화가 심화된다고….
정규재 논설실장
그러나 이 말은 마르크스 때부터 떠들어온 거짓말이다. 세상은 곧 종말을 맞을 것이라는 유사 종말론이다. 좌익은 원래 종말적 교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선진국에서 빈부격차가 시작된 것은 70년대 중반부터다. 사회주의 정당들의 복지국가론이 본격화했던 시기다. 일본은 90년대부터다. 잃어버린 20년의 결과가 지금의 빈부격차다. 한국도 90년대부터다. 이때부터 제조업 노동자의 인구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저성장이 구조화되었다. 실은 성장이 아니라 저성장이 양극화의 주범이다. 스웨덴의 사례를 보더라도 소위 보편복지가 저성장을 낳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양극화를 주장하는 자본주의 원죄론은 번지수가 잘못되었다. 세계적으로 양극화가 진행 중이라는 말도 거짓말이다. 미국,일본,한국에서도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으므로 세계가 양극화되고 있다고? 미안하지만 아니다. 합성의 오류(fallacy of composition)다. 합성의 오류는 부분의 합을 전체와 같다고 착각하는 오류다. 양극화로 말하자면 세계는 점점 상향 평준화되는 아주 바람직한 과정에 있다. 지구촌에서 새로 중산층에 진입하는 호모파베르(노동하는 인간)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있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한국도 지금은 인구의 상당수가 중산층이다. 국가 간 빈부격차,예를 들어 중국 인도 브라질은 선진국과의 격차를 줄이고 있다. 2018년이면 선진국 GDP와 신흥국 그룹의 GDP가 같아진다. 아니 이때부터 개도국이 선진국을 넘어서게 된다. 자본주의 체제,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의 본질인 세계화가 지구촌 인구를 평등하게 만들고 있다. 개도국의 삶의 질이 개선되는 것에 반대하면서 인류애나 정의를 말하는 것은 위선자이거나 국수주의다.
골드만삭스 추산에 따르면 브릭스의 중산층은 G7 전체 인구보다 많은 8억명으로 불어났다. 인도에서는 매년 4000만명씩 중산층에 편입된다. 그렇게 2020년에는 개도국 중산층 인구가 16억명을 넘어선다. 유럽이 지고 남미대륙이 부상하며 미국이 지고 중국과 인도가 부상한다. 지금의 양극화는 유럽 백인 국가들에서 중남미 아시아의 유색 인종으로 부(富)가 옮겨 오는 과정이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인종차별을 없애고 계급을 철폐하며 인간을 평등하게 대우한다. 칸트가 영구평화론에서 지적했던 평화체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작년에 중국에 새로 진출한 외국기업은 1만8000개였다. 많이 줄어든 수치다. 5년 전에는 매년 5만개 기업이 중국으로 진출했다. 그러니 거친 일 하기 싫은 선진국에서 구멍이 뻥뻥 뚫려 나갔다. 선진국 일자리가 줄어든 것이나 한국 중소기업이 어려워진 것이나 원인은 같다. 한국은 한때 중국에 매년 100억달러를 투자했다. 당연히 일자리도 옮겨갔다.
세계화에 반대하는 것은 중국인과 인도인의 생활이 개선되는 것에 반대하는 것과 같다. 누구든지 열심히 일하면 그의 생활이 개선된다. 게으른 그리스인보다 중국인이 잘 살게 되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또 미국에서 일감을 받아 밤을 새워 일하는 인도인들이 잘 살게 되는 것이 정의의 원칙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이 정의라는 말인가. 누가 세계화에 반대한다는 것인가. 지금 한국인에게 주어진 문제는 중국의 등을 타고 성장 체제를 지속하는 것이다. 민주당의 反FTA는 아둔함의 증거다. 이대로 살다 죽자는 것이다.
정규재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