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를 둘러멘 ‘젊은 선장’…음악 콘텐츠 사냥으로 ‘잠자는 거인’ 을 연주하다

토마스 라베 베르텔스만 CEO
독일 베스트팔렌주 전원도시 귀터스로.유럽 최대 종합미디어회사인 베르텔스만의 본사가 있는 곳이다.이 회사 차기 최고경영자(CEO)로 확정된 토마스 라베(46)의 사무실엔 전자기타가 가득하다. 단정하게 빗은 머리에 애기(愛器) ‘파울라’를 옆에 끼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라베는 보수적인 독일의 출판·미디어 공룡 베르텔스만을 변화시킬 주인공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다.그는 독일과 네덜란드,벨기에 접경지대에 있는 변경도시 아헨 출신이다.아헨은 다른 독일 도시들과 달리 개방적이고 다문화적인 전통을 갖고 있는 곳이다.젊은 시절 이곳에서 ‘한가닥’ 하던 뮤지션(베이스 기타리스트)이었던 라베는 유명 록밴드 ‘폴리스’와 ‘큐어’ 등의 음악에 심취했다.40대 중반이 된 라베는 젊은시절의 자유분방함과 창의성을 무기삼아 ‘뉴욕 뉴욕’ 같은 ‘추억의 명곡’에 대한 저작권 사냥전략에 골몰하고 있다.◆전직 기타리스트의 음원사냥

베르텔스만은 서적·잡지 출판업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유럽 최대 미디어·출판업체인 베르텔스만은 최근 미래 디지털 시대를 맞아 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야심차게 진행하고 있는 사업은 음악 드라마 등 미디어 콘텐츠 사업 분야다.176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르텔스만이 내년부터 46세 젊은 선장의 지휘를 받게 된 것은 그가 베르텔스만의 ‘오늘’과 ‘내일’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기 때문이다.

라베가 이처럼 베르텔스만의 미래를 음악과 방송콘텐츠에서 찾은 것은 뮤지션이 되고 싶었던 꿈과도 무관치 않다.베르텔스만 합류 초기부터 라베는 기타리스트로서 경험을 적극 활용했다.베르텔스만 내 음악 비즈니스 사업을 맡고 있는 BMG가 음악전문 출판사 체리레인뮤직출판사와 에버그린카피라이트를 인수할 때 각종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2009년 라베는 아예 BMG 경영을 떠맡았다.그가 BMG 경영에 나선 후 음원콘텐츠는 베르텔스만의 미래 핵심사업으로 부상하고 있다.베르텔스만이 음악 비즈니스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관문이 된 셈이다.이를 계기로 베르텔스만은 음악 콘텐츠 관련 각종 사업을 벌이게 됐기 때문이다.현재 베르텔스만은 EMI가 보유하고 있는 20억달러 규모 음악저작권 인수협상을 벌이고 있다.음원확보 협상에 성공하면 BMG는 ‘뉴욕 뉴욕’에서부터 ‘롤링 인 더 딥’ 등까지 130만곡의 저작권을 확보하게 된다.

라베는 CEO선임 이전인 2006년 부터 EMI 인수에 대한 욕심을 드러냈다.EMI를 인수할 경우 BMG와 시너지 효과가 클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씨티증권이 EMI를 인수한 후에는 EMI가 갖고 있는 음원 콘텐츠 인수를 추진 중이다.

◆화려한 경력이 회사의 미래라베 CEO 내정자가 전통 출판회사 베르텔스만을 뉴미디어 콘텐츠 업체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난 10년간 한 일과 무관치 않다.라베는 2000년부터 5년간 베르텔스만의 계열사 RTL의 CEO를 지냈다. 2006년부터 그룹 최고재무책임자(CFO)로서 RTL 경영에 관여했다.유럽 최대 TV·라디오 프로덕션 및 방송광고업체인 RTL은 지난해 55억9100만유로(8조7000억원)의 매출에 6억1100만유로(9513억원)의 순익을 거뒀다.지난해 베르텔스만 그룹 전체 순이익(6억5600만유로)의 대부분이 RTL에서 나온 셈이다.

회사가 음악과 함께 새로운 미래의 수익원으로 삼고 있는 투자 부문의 성장을 담당한 것도 그의 몫이었다.베르텔스만 디지털미디어투자사업부문(BDMI)과 베르텔스만 아시아투자펀드(BAI)의 운영도 책임져왔다.어느 순간 회사의 현재와 미래가 모두 라베의 손에 달리게 된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금융위기 격변 속에서 베르텔스만이 실적을 키워나갈 수 있는 데는 RTL의 실적호조에 기댄 바가 크다”고 분석했다.◆“전통기업의 디지털화 앞장”

라베가 CEO로 내정되자 언론들은 일제히 기대감을 나타냈다.거대한 공룡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감탄사였다.비즈니스위크는 “거대 전통 기업이 디지털 시대를 향해 야심찬 포석을 두고 있다”고 평가했고,인터내셔널비즈니스타임스는 “옛날 스타일 업체를 페이스북처럼 고치기 위한 선택”이라고 호평했다.“베이스기타를 둘러멘 비전 제시자”(독일 경제일간 한델스블라트)란 표현도 나왔다.

이는 라베가 전임 CEO들과 많은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전임 CEO들이 베르텔스만 본사가 있는 시골마을 귀터스로의 책더미에 파뭍혀 북클럽활동에 전전할 때,그는 신수종 사업을 위해 다국적 기업들과 경쟁하고 규제기관과 협상하는 전장을 헤쳐왔다.그의 이력은 언론의 기대감이 괜히 나온게 아님을 보여준다.

그는 록밴드 기타리스트에서 경제학박사(쾰른대),브뤼셀 대형로펌 변호사를 거쳐 전문 경영인으로 변신을 거듭했다.라베는 영어 불어 독어 네덜란드어 등 5개국어에 능통하고 변호사 시절에는 과거 베를린에서 옛 동독 기업들의 민영화 작업에 참여한 경험도 있다.그의 변신능력이 회사 경영에도 통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크다.귄터 틸런 베르텔스만 이사회 의장은 “토마스가 성장전략과 미래 개발을 위한 원동력을 제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라베는 제1 과제로 베르텔스만을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에 맞는 체질로 전환하는 것을 꼽았다.애플발 뉴미디어 플랫폼 변신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애플의 아이패드는 미디어 콘텐츠를 소비하는 방식을 급격히 변화시키며 책,음악,영화 등 모든 콘텐츠 시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이를 변화에 적응하는 것은 미디어 전문 업체의 생존이 달린 문제라는 게 그의 판단이다. 라베는 “미디어 시장의 격변기에 장기적인 시각을 갖고 창조적이고 전략적인 접근을 하는 것은 미디어콘텐츠 업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게 그의 취임 일성이다.이미 베르텔스만의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콘텐츠와 ‘웹’ 부문에서 나오는 매출은 신문과 잡지,출판 등 전통 사업의 낮은 성장성을 보완해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베르텔스만 경영진 변화에 대해 독일 일간 프랑크푸르터알게마이네차이퉁은 “라베 CEO 내정자는 ‘약삭빠른 음악가(Der schlaue Musikus)’라고 할 만하다”며 “차가운 계산능력과 창조적인 두뇌를 모두 갖춘 라베가 뉴미디어 환경 변화 속에 새로운 돌파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김동욱 기자 kimd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