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을 갖고 튀어라…종로ㆍ강남 소매상 잇단 '야반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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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리포트서울 강남과 종로 보석상가에서 최근 대금을 치르지 않은 보석을 들고 도주하는 보석도매상과 판매업자들이 부쩍 늘고 있다. 금값 급등으로 금 수요가 줄어 상가문을 닫을 지경에 내몰리자 생명과도 같은 신용을 헌신짝 버리듯 야반도주하고 있다. 영수증을 주고받지 않고 거래장부도 작성하지 않는 게 이 업계의 관행이었지만 이제는 이를 꼼꼼히 챙기는 보석상까지 나타나고 있다.
한 달 새 5건…수십억대 피해
금값 급등으로 영업 어렵자 영수증 없는 신용거래 '악용'
7일 경찰과 보석업계에 따르면 최근 한 달 새 종로 · 강남 일대에서 보석을 들고 도주하는 범죄 5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보석을 들고 도주하는 범죄는 1년에 한두 건 정도에 불과했다. 지난달 중순,종로에서 10년 이상 보석 도매 · 감정을 해온 S업체 이모 사장이 도주했다. 피해자인 김모씨는 "이씨가 들고 도망간 보석은 6억원어치"라며 허탈해했다. 이씨는 보석을 좋은 값에 팔아주겠다고 가져간 뒤 판매대금을 탕진하자 다른 업체의 보석을 팔아 대금을 메우는 등 '돌려막기'를 한 것으로 드러났다. 비슷한 시기 서울 강남경찰서에는 청담동 B웨딩숍 사장 김모씨가 신혼부부 15쌍의 예물 2000만원,상점에 진열돼있던 보석 3000만원어치,개인적으로 빌린 3000만원 등 총 8000만원 상당을 들고 달아났다는 고소장이 접수됐다. 지난 7월 말에는 보석 기술공 손모씨가 손님들이 맡긴 깨진 다이아몬드 등 10억여원에 해당하는 금품을 전당포에 맡기고 도주했다가 서울 혜화경찰서에 지난 2일 검거됐다.
이처럼 '보석 도주범'이 늘고 있는 건 이들만의 독특한 거래방식 탓이다. 종로 보석상가에서 7년간 일해온 박모씨는 "여기에서 일하면서 현금계산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다"며 "도매상들은 '한번 팔아보라'며 보석을 건네주고,소매상들은 그 보석이 팔리면 그때서야 대금을 지불한다"고 말했다. 보석이 팔리기까지 한두 달 정도 걸리는 건 기본.이렇다보니 강남 인근에서 보석 장사를 하는 이들은 주고받아야 할 돈이 월 5억~10억원은 족히 되는 '큰손'들이다.
경기가 좋을 때는 별탈없지만 장사가 안될 땐 이같이 '신용'을 역이용한 범죄가 늘 수밖에 없는 거래 구조다. 종로 금은방 상인들은 "도주범 중 열에 아홉은 평소 성실한 이미지를 쌓았던 사람들"이라고 입을 모았다. 도주범들이 늘고 있지만 정작 피해 상인들은 "마땅히 대응할 방법이 없다"며 발만 동동 구른다. 종로 보석상가의 한 상인은 "도매상들이 세금신고를 충실하게 하지 않다 보니 피해가 발생해도 경찰서에 들락날락하는 것을 싫어한다"고 털어놨다.
심성미 기자 smsh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