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국력이다] (6)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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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크게 가져라...인생은 딱 한 번뿐이다"손 회장은 한국 일본 미국의 DNA를 모두 가졌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조센진’이었고 미국에서 고등학교와 대학 교육을 받았으니 그의 DNA는 이중 나선이 아니라 삼중 나선 구조를 띠고 있으리라.
그는 1957년 8월 일본 규슈(九州)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손 마사요시. 그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할아버지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그는 ‘조센진’이라는 놀림을 수없이 받았다.
일본 학생이 던진 돌멩이에 맞은 적도 있다. 어린 손정의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16살 때인 1974년 그는 각혈하는 부모를 두고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탈번’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는 청소년기 때 번주(주군)를 떠나는 탈번(脫藩)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누나가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큰일을 하거라. 우리는 괜찮다”고 말해주자 떠났다. 이 이야기를 접한 손정의도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부모를 두고 미국행을 택했다.어렵사리 미국에 도착한 그는 공부에 올인했다. 빨리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주일 만에 그는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독파했다.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을 이해했다.
10학년을 끝냈다고 생각한 그는 교장을 만났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지만 교장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손정의는 다시 11학년 교과서를 모두 구했다. 사흘간 밤을 새우며 전체를 섭렵했다. 그는 또 교장 면담을 요구했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사흘 뒤 손정의는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고 말했다. 교장은 말리지 않고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봐라”고 격려했다. 합격하리라는 생각을 안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하지만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이 너무 많았다. 그는 손을 들고 감독관에게 부탁했다. “일본에서 와서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은 되돌아와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는 합격했고 고교 과정을 그렇게 끝내버렸다.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어요.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습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어요.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어요.
덕분에 19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대학 졸업 후인 1981년 9월 그는 일본 경영종합연구소와 반반씩 출자해 자본금 1000만엔으로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직원 2명으로 컴퓨터를 유통하는 작은 회사였다.
1990년 일본소프트뱅크에서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초고속인터넷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에서 아직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없었을 때였다. 인터넷에 미래가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 그는 초고속인터넷 요금을 절반 가격으로 낮추는 승부수를 띄워 가입자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후 그는 “미쳤다” “일본에서 온 거품남(男)이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사업을 확장해 갔다.
유선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한 통신, 기술, 방송업체들을 인수했다.
또 일본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통해 소프트뱅크 모바일을 설립했다. 미래 통신은 모바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고 한다.
BB모바일도 이동통신 부문의 자회사다. 검색 포털 분야도 갖춰야 할 부문이었다.
그는 무리한 인수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야후 대주주가 됐다. 야후재팬이다. 인포랜드와 넷컬처, 다비게이터 등도 보유하고 있다. 또 기술 서비스를 위해 킹스톤테크놀로지 등을 인수해 소프트뱅크 테크놀로지를 만들었다.
방송 미디어 부문도 TV아사히 지분 인수와 위성방송 J스카이B를 설립해 강화했다.
“올라가야 할 산 꼭대기까지는 먼데 아직 3%밖에 못 온 것 같다. 산은 점점 커지고 있다.
난 아직도 너무나 작은 존재다.” 연매출 3조엔(45조원)의 그룹을 이끄는 그는 최근 ‘주일 미국대사관 주최 특별대담’에서 한 청중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해 정열과 꿈을 가져라” “자신만의 큰 영웅(big hero)을 만들고, 도전할 산(mountain)을 정해라.
그 뒤엔 고민하지 말고 도전하라. 이 산과 저 산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그냥 배회하는 것일 뿐이다”고 강조했다.
그의 영웅은 19세기 최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 그가 정한 산은 정보통신기술(ICT)이다.
그는 대담에서 재일교포 3세에 대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16세 때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료마처럼 살겠노라’며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청중들을 향해 “꿈을 크게 가지라. 인생은 딱 한 번뿐(Life is only one time)이다”고 외쳤다.
지난해 6월 25일 30회 정기주총에서 그는 ‘소프트뱅크 신30년 비전’을 발표했다.
30년 뒤 지금의 10배인 시가총액 200조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 뜬구름 잡기”라는 비난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라고 했다.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세운 것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다. 큰 스케일로 미래를 그려갈 후계자를 기르는 곳이다.
30년 뒤 소프트뱅크를 키우려면 보통의 생각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아시아를 강조한다. 중국 때문이다. 이 나라 인터넷산업의 성장률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타오바오는 소프트뱅크와 알리바바닷컴이 각각 지분 50%씩을 보유한 중국 인터넷거래 업체다.
이 회사의 2년 전 매출은 3조엔, 지난해엔 무려 5조엔이었다. 동종 일본 최대 기업 라쿠텐의 6배가 넘는다. 이런 식으로 중국은, 아시아 인터넷 시장은 무섭게 커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
그는 1957년 8월 일본 규슈(九州)에서 태어났다. 일본 이름은 손 마사요시. 그의 성장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할아버지와 부모가 모두 한국인인 그는 ‘조센진’이라는 놀림을 수없이 받았다.
일본 학생이 던진 돌멩이에 맞은 적도 있다. 어린 손정의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는 상상 이상의 것이었다.16살 때인 1974년 그는 각혈하는 부모를 두고 혼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탈번’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그는 청소년기 때 번주(주군)를 떠나는 탈번(脫藩)을 할까 말까 고민하던 중 누나가 “료마, 가라! 너는 초야에 묻히고 말 재목이 아니다.
나가서 큰일을 하거라. 우리는 괜찮다”고 말해주자 떠났다. 이 이야기를 접한 손정의도 큰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 부모를 두고 미국행을 택했다.어렵사리 미국에 도착한 그는 공부에 올인했다. 빨리 대학에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1주일 만에 그는 10학년 교과서를 모조리 독파했다. 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핵심을 이해했다.
10학년을 끝냈다고 생각한 그는 교장을 만났다. “10학년 교과서를 다 봤습니다. 11학년 수업을 듣게 해주세요.” 무리한 요구였지만 교장은 “그렇게 하라”고 했다.
손정의는 다시 11학년 교과서를 모두 구했다. 사흘간 밤을 새우며 전체를 섭렵했다. 그는 또 교장 면담을 요구했다. “11학년도 됐어요. 12학년으로 가겠습니다.” 다시 사흘 뒤 손정의는 “고등학교 졸업 검정시험을 치겠습니다”고 말했다. 교장은 말리지 않고 “네가 원한다면, 그리고 할 수 있다면 해봐라”고 격려했다. 합격하리라는 생각을 안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그는 얼마 뒤 검정시험을 치러 갔다. 하지만 문제의 양, 해독해야 할 문장이 너무 많았다. 그는 손을 들고 감독관에게 부탁했다. “일본에서 와서 영어가 서툴러요.
이 시험은 영어가 아닌 학업 수준을 테스트하려는 것 아닙니까. 일영사전을 쓸 수 있게 해주세요. 그게 공정합니다.”
감독관은 한마디로 딱 잘라 “안 된다”고 했다고 한다. 그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내겐 그런 배려를 받을 권리가 있다는 주장을 끈질기게 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시험장 밖으로 나갔던 감독관은 되돌아와 “교육청 허락을 받았으니 사전을 써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는 합격했고 고교 과정을 그렇게 끝내버렸다.
“바로 명문대에 진학하는 건 불가능했어요. 나는 미국에 대학입학자격시험(SAT)이란 게 있다는 걸 몰랐어요. SAT 성적 없이도 갈 수 있는 학교를 찾아야 했습니다.
한국의 2년제 대학에 해당하는 홀리네임스칼리지에 들어갔어요. 2년 동안 전 과목 A학점을 받았어요.
덕분에 1977년 여름 드디어 UC버클리 경제학과 2학년으로 편입할 수 있었어요.”
대학 졸업 후인 1981년 9월 그는 일본 경영종합연구소와 반반씩 출자해 자본금 1000만엔으로 일본소프트뱅크를 설립했다. 직원 2명으로 컴퓨터를 유통하는 작은 회사였다.
1990년 일본소프트뱅크에서 오늘날의 소프트뱅크로 이름을 바꿨다.
그는 초고속인터넷 사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일본에서 아직 초고속인터넷 사업이 없었을 때였다. 인터넷에 미래가 있다는 점을 간파한 것. 그는 초고속인터넷 요금을 절반 가격으로 낮추는 승부수를 띄워 가입자를 폭발적으로 늘렸다.
이후 그는 “미쳤다” “일본에서 온 거품남(男)이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 사업을 확장해 갔다.
유선 초고속인터넷 사업을 위한 통신, 기술, 방송업체들을 인수했다.
또 일본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을 통해 소프트뱅크 모바일을 설립했다. 미래 통신은 모바일이 될 것이라는 점을 확신했다고 한다.
BB모바일도 이동통신 부문의 자회사다. 검색 포털 분야도 갖춰야 할 부문이었다.
그는 무리한 인수라는 평을 들으면서도 야후 대주주가 됐다. 야후재팬이다. 인포랜드와 넷컬처, 다비게이터 등도 보유하고 있다. 또 기술 서비스를 위해 킹스톤테크놀로지 등을 인수해 소프트뱅크 테크놀로지를 만들었다.
방송 미디어 부문도 TV아사히 지분 인수와 위성방송 J스카이B를 설립해 강화했다.
“올라가야 할 산 꼭대기까지는 먼데 아직 3%밖에 못 온 것 같다. 산은 점점 커지고 있다.
난 아직도 너무나 작은 존재다.” 연매출 3조엔(45조원)의 그룹을 이끄는 그는 최근 ‘주일 미국대사관 주최 특별대담’에서 한 청중의 질문에 이같이 대답했다.
이 모임에서 그는 “한 번뿐인 인생을 위해 정열과 꿈을 가져라” “자신만의 큰 영웅(big hero)을 만들고, 도전할 산(mountain)을 정해라.
그 뒤엔 고민하지 말고 도전하라. 이 산과 저 산 사이를 저울질하는 건 그냥 배회하는 것일 뿐이다”고 강조했다.
그의 영웅은 19세기 최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 근대화를 이끈 사카모토 료마, 그가 정한 산은 정보통신기술(ICT)이다.
그는 대담에서 재일교포 3세에 대한 차별에 괴로워하던 16세 때 가족들의 반대를 뿌리치고 ‘료마처럼 살겠노라’며 미국 유학을 결심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는 청중들을 향해 “꿈을 크게 가지라. 인생은 딱 한 번뿐(Life is only one time)이다”고 외쳤다.
지난해 6월 25일 30회 정기주총에서 그는 ‘소프트뱅크 신30년 비전’을 발표했다.
30년 뒤 지금의 10배인 시가총액 200조엔 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나도 없는 뜬구름 잡기”라는 비난이 나왔다. 하지만 그는 진심이라고 했다.
미래를 위해서는 인재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래서 세운 것이 ‘소프트뱅크 아카데미아’다. 큰 스케일로 미래를 그려갈 후계자를 기르는 곳이다.
30년 뒤 소프트뱅크를 키우려면 보통의 생각으론 불가능하기 때문에 큰 인물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는 아시아를 강조한다. 중국 때문이다. 이 나라 인터넷산업의 성장률은 그야말로 눈부시다.
타오바오는 소프트뱅크와 알리바바닷컴이 각각 지분 50%씩을 보유한 중국 인터넷거래 업체다.
이 회사의 2년 전 매출은 3조엔, 지난해엔 무려 5조엔이었다. 동종 일본 최대 기업 라쿠텐의 6배가 넘는다. 이런 식으로 중국은, 아시아 인터넷 시장은 무섭게 커갈 것이라는 진단이다.
고기완 한국경제신문 연구위원 dada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