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영주 선비촌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
김주영의 소설 '객주'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여인의 속살은 섣달 자리끼처럼 찼다. '사랑하지 않는 남정네에게 억지로 안긴 여인의 싸늘함을 드러낸 것이다. 옛 한옥의 겨울은 추웠다. 웃풍이 심해 이불 밖으로 내놓은 코는 시렸고,머리맡에 둔 자리끼엔 살얼음이 얼었다.

세월의 힘일까. 19일 밤,경북 영주시 선비촌 '두암(斗巖 · 김우익 · 1571~1639) 고택' 아랫방은 쩔쩔 끌었다. 구들장 대신 전기 패널을 깔아 윗목도 없었다. 세 개의 문 중 둘은 비닐로 꼭꼭 막아 웃풍도 줄었다. 밖은 기온이 뚝 떨어진데다 바람까지 거셌지만 방안은 따뜻했다. 반닫이와 삼층장이 놓이고 고비와 족자가 걸린 방은 아늑하고 푸근했다. 불편한 점도 없지 않았다. 방문이 작아 들고 나자면 고개를 숙여야 했고,화장실을 찾아 한밤중에 대문 밖으로 나가야 했다. 전시용으로 건넌방에 놔둔 한복 입은 밀랍인형 때문에 무서웠다는 사람도 있었다.

드라마 '추노' 촬영지로도 유명한 선비촌은 조선시대 전통가옥을 복원하고 생활상을 재현,선조들의 삶을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조성한 일종의 테마파크다. 문화관광부와 경상북도의 유교문화권 조성사업의 하나. 소수서원 옆에 만죽재(반남박씨 판관공파 종택),해우당(고종 때 의금부도사 김락풍의 집),인동장씨 종택,김세기(고종 때 대사헌) 가옥,두암고택 등 영주시의 기와집 7채와 초가집 5채 및 강학당 · 정려각(효자 · 열녀 · 충신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 · 산신각 · 원두막 · 곳집(곳간) · 대장간 · 장터 · 연자방아 등 토속시설을 모두 모았다.

곳곳에 거무구안(居無求安 · 사는데 편한 것만 구하지 말라),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 · 가난이 아니라 도를 근심하라) 등 선비 정신을 새긴 팻말이 보이는 마을엔 전신주와 가로등이 없다. 지중선을 깔고 바위 모양 조명기구를 설치한 덕이다. 스마트 기기에 매여 다들 디지털 좀비가 돼가는 것 같다는 세상이다. 노상 바쁜 생활, 자나깨나 환한 도시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한번쯤 찾아봐도 좋을 성싶다. 조용하고 정갈한 방에 누워 생각하다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참다참다 일어나 뒷간까지 가자면 춥고 무섭기야 하겠지만 온몸을 휘감는 찬바람에 정신도 번쩍 들고,쏟아져 내릴 것 같은 별들도 만날 것이다. 1박2일이면 소수서원과 부석사,무섬마을까지 돌아볼 수 있을 테고.

박성희 수석논설위원 psh77@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