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대 석·박사 데려와도 쓸모없어…" 교수 위주 커리큘럼 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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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인재 10만명 키우자#1. 현대자동차의 기술센터인 남양연구소는 요즘 ‘메커트로닉스(기계+전자)형 인재 양성’에 골몰하고 있다. 자동차에 전자제어 기술이 적용되는 사례가 늘면서 기계와 전자를 모두 아는 융합형 인재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는 것. 하지만 이런 인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남양연구소 관계자는 “올초 연구소에서 700명가량을 뽑았는데 기계도 알고, 전자도 아는 인력은 5%도 채 안된다”며 “이런 학생을 키우는데 대학이 좀 더 신경을 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창조형 국가로 가는 길 - (6) 대학문호 산업계에 활짝 열어야
대학진학률 OECD 최고…현장에 바로 쓸 인재 없어
기술융합에 인문학 결합…'통섭형 인재' 육성 시급
#2. 미국 보스턴에 있는 올린공대는 2002년 개교한 신생 공대다. 전교생이 337명에 불과하지만 미국 공학 교육의 혁신을 주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올린공대가 내세우는 교육 이념은 ‘공학을 넘어선 공학교육’이다. 융합 교육을 위해 아예 학과 제도를 없앴고, 교수들은 5년마다 커리큘럼을 바꿔야 한다. ‘융합’이 산업계 화두로 떠오르면서 올린 공대 졸업생의 몸값은 뛰고 있다. 하버드나 MIT 합격 통지서를 받고도 올린으로 발길을 돌릴 정도다.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인 80%의 대학진학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공계 졸업생 가운데 기업에서 바로 데려다 쓸 만한 인재가 없다는 게 문제다. 대학 현장에선 10년 전 커리큘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공급자 중심의 수업이 계속되면서 국내 산업계의 인재 수급불균형은 심화되고 있다.
○산업현장과 괴리된 이공계 교육
대기업 중심으로 연구·개발(R&D) 투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R&D를 담당할 우수 이공계 연구 인력을 찾는데 애를 먹고 있다. 업계에선 “국내 명문대 석·박사 출신을 데려와도 이직만 생각하지 별 쓸모가 없다”는 얘기까지 공공연히 나오고 있다.최근 기업들이 앞다퉈 진출하고 있는 그린(green) 산업과 바이오 산업 등 신사업 분야에선 이런 고급 인력난은 더욱 심각하다. 한 대기업 관계자는 “기업들이 많은 비용을 들이면서까지 해외 현지 채용에 나서는 이유는 국내에선 현재 추진 중인 미래 사업을 담당할 융합형 인재를 찾기 어렵기 때문”이라며 “국내 이공계 졸업생을 뽑아 재교육을 시키기보다 높은 연봉을 주고서라도 현장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인력을 뽑는 게 더 이득”이라고 말했다.
○우물안식 대학교육 혁신해야
전문가들은 이 같은 산학 괴리 현상의 원인을 후진적인 대학 교육에서 찾고 있다. 천경준 씨젠 회장은 “미국 스탠퍼드대는 10년 전만 하더라도 바이오보다 IT 전공 학생들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현재는 상황이 역전됐다”며 “시대와 기술 트렌드에 맞춰 유기적으로 변하는 선진 대학들과 달리 한국의 대학은 제자리걸음을 하는데 그치고 있다”고 지적했다. 천 회장은 이어 “교수에 맞춰 커리큘럼이 짜여지는 우물안식 대학교육으로는 산업기술의 요구를 따라갈 수 없다”고 덧붙였다.현재 정부가 추진 중인 부실대학들의 통폐합을 통해 국내 대학의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는 의견도 많다. 선택과 집중을 통한 대학 구조조정의 성공사례는 중국에서 찾을 수 있다. 중국은 1990년부터 2006년까지 총 1000여개 대학을 대상으로 구조조정을 실시, 428개 대학으로 통폐합했다.
○이공계와 인문학 결합이 진짜 융합
단순한 기술적 융합을 넘어 기술과 인문학의 결합을 통한 창의적 인재 육성도 우리 과학계가 당면한 과제다. 홍성창 경기대 환경에너지시스템공학과 교수는 “IT BT(바이오기술) NT(나노기술) 등 이공계 학문만으로는 진정한 융합이 안된다”며 “인문학 미학 철학 같은 학문이 이공계와 결합해야 진짜 융합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최근 국내 석학들의 모임인 한림원은 미국식 전문이학석사제도(PSM)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눈길을 끌었다. PSM은 이공계 석사과정을 이수하면서 경영학, 경제학, 법학 등 실용학문을 동시에 교육받는 대학원 과정이다. 김용근 산업기술진흥원장은 “공대와 경영대, 문과대 등 학과의 경계를 넘어 학생들에게 더 많은 가능성을 부여할 수 있는 통섭교육 방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정호 기자 dolp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