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逆혁신'으로 신흥시장 뚫어라

[경영학 카페]

2만5000원짜리 정수기·500弗짜리 심전도계

역혁신 성공하려면 성장있는 곳에 권한 주고 현지조직은 창업하듯 목표·평가기준 현지화해야
인도 시골에 사는 사람들의 75%는 아직도 깨끗한 물을 공급받지 못하고 있다. 매년 여름이면 오염된 식수로 인한 콜레라나 집단 설사가 발병하고, 수백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다. 250만원짜리 자동차 ‘나노’로 유명한 인도의 타타그룹은 물 때문에 고통받는 서민들을 대상으로 초저가 정수기 ‘타타 스와치’를 출시했다. 작은 은 조각과 쌀겨로 만든 정수기 가격은 단돈 2만5000원. 필터를 한번 갈아 끼면 5인 가족이 200일 이상을 사용할 수 있다.

중국의 의료 인프라는 열악하다. 지금도 인구의 90% 이상은 기술력이 떨어지는 병원이나 시골의 진료소에 의존하고 있다. 도시의 큰 병원으로 나가는 교통 수단도 불편하다. 환자를 도심 병원으로 이송하기 어렵기 때문에 기기를 갖춘 의료진이 환자를 찾아가야 한다. GE는 2009년 이들을 대상으로 등에 가볍게 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심전도 기계를 개발했다. 심전도 측정을 위한 필수 기능만 탑재한 이 제품의 대당 가격은 단돈 500달러.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병원의 심전도 기계가 대당 1만달러가 넘는 것을 감안한다면 ‘통 큰’ 심전도 기계라고 할 만하다. 워낙 저가인데다 최근에는 교통사고 현장에서도 유용성이 입증돼 미국과 유럽을 포함한 194개 국에서 판매되고 있다.타타의 정수기와 GE의 휴대용 심전도 기계에는 공통점이 있다. 신흥시장 소비자를 공략하기 위해 제품을 개발하고, 이를 선진국 시장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을 ‘역혁신(reverse innovation)’이라고 한다. ‘역’이라고 하는 이유는 기존 글로벌 기업들이 채택했던 방식과는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기존 방식에서는 선진국 시장을 타깃으로 우수한 상품을 개발한 다음, 개도국 현지 상황에 맞게 변형한 상품을 내놓았다. 부유한 국가들이 세계 시장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다른 국가들은 별다른 시장 기회를 만들어내지 못하던 시기에는 이런 방식이 먹혔다. 하지만 좋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거대한 인구를 가진 중국과 인도가 빠르게 성장하는 반면 선진국의 성장 속도는 느려졌기 때문이다.

‘아하! 그렇다면 이제 우리 기업들도 역혁신 방법론을 도입해 신흥시장으로 진출하면 되겠구나’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문제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오른손잡이한테 자꾸 왼손으로 밥을 먹고 글씨를 쓰라고 하면 견디기 어렵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존 방식은 익숙하고, 새로운 방식은 불편하다. 이제까지 대규모로 성장한 기업들은 중앙 집중화된 제품 구조와 관행을 통해 현재의 성공을 일궈냈다. 그런데 역혁신을 위해서는 현지 시장을 중시하는 분산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성공요인이 이제는 역혁신의 걸림돌이 됐다.

그렇다면 이런 걸림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GE의 제프리 이멜트 회장과 다트머스 경영대학원의 비제이 고빈드라잔 교수는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발표한 논문에서 몇 가지 팁을 제시했다. 첫째, 성장이 있는 곳에 권한을 줘야 한다. 현지 사업부가 자율권을 갖지 못하면 본사의 사업 방향에 예속될 수밖에 없고, 개도국 시장의 고객 문제에 집중할 수 없게 된다.

둘째, 현지 조직은 회사를 창업하듯 원점에서부터 만들어나가야 한다. 현지 사업부는 기존의 관행을 답습하기보다 현지 상황에 가장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제도를 새로 설계해야 한다. GE의 경우 미국에서는 고가 의료기기를 판매하기 위해 전문 영업사원을 활용해 왔다. 하지만 곳곳에 흩어져 있는 중국의 시골 시장과 소도시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딜러 망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판단했다. GE 중국 지사는 본사가 갖고 있는 세계적 수준의 영업 및 서비스 네트워크를 포기하고는 독자적인 현지 팀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시장 특성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셋째, 목표 및 평가의 기준을 현지화해야 한다. 현지 특성을 반영하지 않고 본사의 평가 기준을 그대로 가져다 써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현지에서 신제품을 내놓을 때, 정부 승인을 받는 과정이 상대적으로 덜 복잡하다면 제품개발 주기에 대한 성과지표는 본사보다 훨씬 짧게 설정해야 한다. 이제 우리 기업들에도 신흥시장에서 성공하기 위한 역혁신은 선택이 아닌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가 되고 있다. 우리가 먼저 역혁신을 하지 못하면 현지 기업이 먼저 할 것이고, 이는 부메랑이 돼 기존 시장으로 날아들 것이다.

이우창 IGM(세계경영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