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vs 경운궁, 명칭 변경 뜨거운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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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이름을 그대로 쓸까, 경운궁으로 고쳐 부를까.’
사적 124호인 덕수궁(德壽宮) 명칭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덕수궁을 본래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 불거지면서다. 이와관련 문화재청은 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덕수궁 지정명칭 검토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에서는 이민원 원광대 교수와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발제를 중심으로 찬반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이민원 원광대 교수는 덕수궁 명칭 유지를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항간에는 1907년의 헤이그특사사건으로 통감 이토가 광무황제(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친 것이란 설이 난무한다”면서 “그러나 일본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수(德壽)로 정한 것만큼은 일본이 아닌 순종과 대신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덕수궁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대한제국의 융희황제 순종과 당대의 신하들이 결정하여 올린 것을 오늘날의 우리가 변경해도 무방한가 △경운궁으로 불려진 기간이 30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왕궁(혹은 행궁)으로 기능하고 그렇게 지칭된 기간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재위까지 약 30년간(1594~1623), 고종 당시의 약 10년(1897~1907)으로 통산 40년 내외인데 비해 지난 100여년 동안 덕수궁으로 불린 기간이 더 길고 △덕수궁으로 불린 이래 현재까지 진행돼 온 근현대의 역사를 경운궁의 역사로 포함할 수 있는가 △경운궁의 역사를 넘어 덕수궁으로 이어진 근현대의 시련과 영광의 역사를 아우를수 있는 용어로 경운궁이 합당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경운궁 환원을 주장했다. 홍 교수는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면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역사, 외세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으며 나름대로 그것을 물리치려 진력을 다하던 고종과 그 시대 사람들,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어 “이 공간의 의미는 태황제 고종의 거처가 아닌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이었다는 점이고, 주인 잃은 뒤 왜곡되고 훼손되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공간이라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며 “이곳을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로 본다면 마땅히 경운궁으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도형 연세대 교수는 “덕수궁은 근현대의 아픈 정치의 현장이었다. 원칙에 따라 본래 궁궐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일도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된 사건, 사실 또한 ‘역사적’이다”며 “그 이름을 병기하더라도 그 이름의 변화를 더 정확하게 드러내 안내하는 것이 좋다. 그 변화가 바로 역사”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600년 연속선상에서의 역사·문화적 명칭”이라며 경운궁으로의 환원에 반대의견을 냈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덕수궁이란 명칭은 널리 알려져 있어 변경에 따른 사회적 경젝적 비용이 발생되며, 특히 외국인들은 경복궁 경희궁 등과 혼동할 수 있다”며 덕수궁 궁역의 복원이 더 시급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태상왕, 상왕의 존재 여부에 따라 등장했다가 없어진 덕수궁은 태황제, 태왕으로서 기거하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에 승하한 뒤로는 덕수궁으로 불릴 이유가 없었다”며 “이 궁은 왕이 기거하는 궁이란 자격을 잃어 1932년 10월1일에 미술관으로 일반 공개될 때까지 폐쇄된 상태가 됐다”고 지적했다. 또 “조선, 대한제국의 관례에 비추면 덕수궁은 ‘이태왕’ 훙거 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말아야 할 궁호”라고 말했다.
김인걸 서울대 교수는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영욕이 묻어있는 곳으로서, 조선의 전 역사를 반성케 하는 장소다. 이곳에 일제는 고종을 폐위시켜 감금하고 ‘덕수’라는 호칭을 부여한 이후 덕수궁으로 불려 지금까지 ‘추억’의 장소로 사랑받기도 했지만 덕수궁이란 이름은 치욕스런 것”이라며 경운궁으로의 환원을 주장했다.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했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궁궐 전각이 소실돼 머무를 곳이 없어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을 1593년 임시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등장했다. 이후 광해군이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하고 3년 후인 1611년 임시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기고, 대한제국 선포 후 법궁으로 삼았다.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7년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직후 순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
사적 124호인 덕수궁(德壽宮) 명칭에 대한 논란이 뜨겁다. 덕수궁을 본래 이름인 경운궁(慶運宮)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 불거지면서다. 이와관련 문화재청은 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덕수궁 지정명칭 검토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에서는 이민원 원광대 교수와 홍순민 명지대 교수의 발제를 중심으로 찬반의견이 팽팽히 맞섰다. 이민원 원광대 교수는 덕수궁 명칭 유지를 주장했다. 이 교수는 “항간에는 1907년의 헤이그특사사건으로 통감 이토가 광무황제(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후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고친 것이란 설이 난무한다”면서 “그러나 일본이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태황제 고종의 궁호를 덕수(德壽)로 정한 것만큼은 일본이 아닌 순종과 대신들에 의해 결정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덕수궁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리자는 주장을 하기에 앞서 △대한제국의 융희황제 순종과 당대의 신하들이 결정하여 올린 것을 오늘날의 우리가 변경해도 무방한가 △경운궁으로 불려진 기간이 300년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왕궁(혹은 행궁)으로 기능하고 그렇게 지칭된 기간은 임진왜란 이후 광해군 재위까지 약 30년간(1594~1623), 고종 당시의 약 10년(1897~1907)으로 통산 40년 내외인데 비해 지난 100여년 동안 덕수궁으로 불린 기간이 더 길고 △덕수궁으로 불린 이래 현재까지 진행돼 온 근현대의 역사를 경운궁의 역사로 포함할 수 있는가 △경운궁의 역사를 넘어 덕수궁으로 이어진 근현대의 시련과 영광의 역사를 아우를수 있는 용어로 경운궁이 합당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순민 명지대 교수는 경운궁 환원을 주장했다. 홍 교수는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회복하면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역사, 외세에 둘러싸여 압박을 받으며 나름대로 그것을 물리치려 진력을 다하던 고종과 그 시대 사람들, 그들의 삶의 모습을 그려보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고 말했다. 홍 교수는 이어 “이 공간의 의미는 태황제 고종의 거처가 아닌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이었다는 점이고, 주인 잃은 뒤 왜곡되고 훼손되며 정체성을 잃어버린 공간이라는 의미는 중요하지 않다”며 “이곳을 대한제국 광무 연간의 궁궐로 본다면 마땅히 경운궁으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도형 연세대 교수는 “덕수궁은 근현대의 아픈 정치의 현장이었다. 원칙에 따라 본래 궁궐의 이름을 되찾아 주는 일도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된 사건, 사실 또한 ‘역사적’이다”며 “그 이름을 병기하더라도 그 이름의 변화를 더 정확하게 드러내 안내하는 것이 좋다. 그 변화가 바로 역사”라고 말했다.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덕수궁은 조선과 대한제국, 그리고 대한민국으로 이어지는 600년 연속선상에서의 역사·문화적 명칭”이라며 경운궁으로의 환원에 반대의견을 냈다.
김정동 목원대 교수는 “덕수궁이란 명칭은 널리 알려져 있어 변경에 따른 사회적 경젝적 비용이 발생되며, 특히 외국인들은 경복궁 경희궁 등과 혼동할 수 있다”며 덕수궁 궁역의 복원이 더 시급하다는 의견을 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태상왕, 상왕의 존재 여부에 따라 등장했다가 없어진 덕수궁은 태황제, 태왕으로서 기거하던 고종황제가 1919년 1월에 승하한 뒤로는 덕수궁으로 불릴 이유가 없었다”며 “이 궁은 왕이 기거하는 궁이란 자격을 잃어 1932년 10월1일에 미술관으로 일반 공개될 때까지 폐쇄된 상태가 됐다”고 지적했다. 또 “조선, 대한제국의 관례에 비추면 덕수궁은 ‘이태왕’ 훙거 후에는 더 이상 사용되지 말아야 할 궁호”라고 말했다.
김인걸 서울대 교수는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영욕이 묻어있는 곳으로서, 조선의 전 역사를 반성케 하는 장소다. 이곳에 일제는 고종을 폐위시켜 감금하고 ‘덕수’라는 호칭을 부여한 이후 덕수궁으로 불려 지금까지 ‘추억’의 장소로 사랑받기도 했지만 덕수궁이란 이름은 치욕스런 것”이라며 경운궁으로의 환원을 주장했다.
덕수궁은 선조가 임진왜란으로 의주로 피난했다가 한양으로 돌아왔지만 궁궐 전각이 소실돼 머무를 곳이 없어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저(私邸)였던 곳을 1593년 임시행궁으로 사용하면서 궁궐로 등장했다. 이후 광해군이 1608년 이곳에서 즉위하고 3년 후인 1611년 임시행궁을 경운궁이라고 명명했다. 고종은 아관파천 후 1897년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옮기고, 대한제국 선포 후 법궁으로 삼았다.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1907년에 고종이 순종에게 양위한 직후 순종은 경운궁을 덕수궁으로 개칭했다.
김재일 기자 kjil@hankyung.com